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꽤나 강렬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지면서 찾아오는 흥분감에 왠지 모를 엔도르핀이 온몸을 감싸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자체만으로도 강렬한 감정을 가진 사랑의 처음은 어떨까?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겠지만 그럼에도 첫사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공통적인 감정을 가진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2011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 반스는 신작 《연애의 기억》을 통해 또 한 번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곡된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듯이 줄리언 반스는 《연애의 기억》을 통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을 단 하나의 이야기,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한다. 온전하다고 확신할 수 없는 폴의 기억을 통해 우리는 사랑에 관한 줄리언 반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정리되고 걸러진다. 우리가 기억이 우선순위를 정하는 알고리즘에 접근할 수 있을까? 아마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내 짐작으로는, 기억은 무엇이 되었든 그 기억을 갖고 사는 사람이 계속 살아가도록 돕는 데 가장 유용한 것을 우선시하는 듯한다. 따라서 행복한 축에 속하는 기억이 먼저 표면에 떠오르게 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따르는 작용일 것이다. (p. 39)

  열아홉 살의 폴은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테니스 클럽에 나가게 된다. 폴이 또래 여자친구를 사귀길 바랐지만 폴은 자신과 남녀 복식 파트너로 뛴 마흔여덟 살의 수전에게 반하게 된다. 수전의 매력을 느낀 폴은 그녀를 자신의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게 되고,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다가가게 된다. 한편, 수전은 남편과 딸 둘이 있는 유부녀였고 폴은 그녀가 가진 배경보다는 오로지 그녀 자체만을 바라보기로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게 더욱 빠져들게 된 두 사람은 이내 런던으로 사랑의 도피를 하기로 다짐한다. 폴이 내적 갈등을 하고 있을 즈음, 수전이 남편 매클라우드로부터 가정 폭력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갈등 끝에 폴은 수전과 함께 런던으로 떠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대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고,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수도 있고, 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건 아니야. 때로는, 그래서 더욱더 진짜가 되지. (p. 75)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래도 이 정도는 발견했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반면 더 쉽게, 더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첫사랑이 심장을 소작해버려, 그 뒤로는 어떤 탐침을 들이밀어도 흉터 조직만 나올 수도 있지만. (p. 136)

  사랑에 앞서 때로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정해놓은 기준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어간다. 타인이 자신을 향해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자신이 용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우리는 타인을 곁에 두게 된다. 사실 사랑에서는 그 범위가 굉장히 크게 확대가 되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콩깍지'가 바로 이 범위를 확대 시키는 요인이 아닐까 싶다.) 폴에게는 수전이 가지고 있는 배경이 그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 안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그는 수전의 남편 매클라우드와 저녁식사를 하기도 하고, 십자말풀이를 맞추면서도 그에게 어떤 감정조차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신이 허용하는 범위는 서서히 줄어들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비슷하게 돌아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폴은 어땠을까. 런던으로 떠난 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전이 심각한 알콜 중독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수전의 남편 매클라우드가 술을 마시고 돌아와 수전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을 바탕으로 사랑과 알콜 중독은 양립할 수 없다는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게 된다. 여전히 수전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알콜 중독에 빠진 수전 사이에서 그는 끊임없이 갈등하며, 그녀를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기로 다짐한다. 자신이 세운 기준에서 벗어난 수전을 보는 것이 괴로움에도.

  스스로를 괴롭히는 동안, 그의 마음이 기억의 특정한 길을 따르다 종종 도달하게 되는 질문이 있었다. 수전을 되돌려주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자기 보호의 행동이었다. 그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데에도 그의 마음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을 넘어서, 그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비겁한 행동이었을까? (p. 340)

  줄리언 반스는 오로지 폴이 가진 수전과의 사랑에 대한 기억으로 《연애의 기억》을 서술해 내려간다. 총 3부로 이루어진 《연애의 기억》은 독특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에 대한 시점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마치 수전에 대한 폴의 사랑의 거리를 시점으로 나타낸 것처럼, 1부에서 화자는 자신을 '나'라고 표현하지만 2부와 3부에서는 '너'와 '그'로 자신에 대한 기억과의 거리감을 둔다. 시간이 진행됨에 따라 폴의 마음 역시 점점 식어간다. 그래서 3부를 읽으면서 자신의 기억 속에 폴을 '그'라고 표현하면서, 줄리언 반스는 수전을 향한 폴의 사랑이 점차 희미해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라는 단어에서도 느끼듯이 감정은 없고 오로지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
  첫사랑의 강렬한 감정들은 모두 기억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오로지 그 기억에 의존하여 다시 되짚어 볼 뿐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기억에 대해 자신 스스로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녀도 나를 사랑했을까. 줄리언 반스는 오늘도 '기억'을 가지고 독자들에게 서늘한 통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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