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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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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는 꽤 깊이 박혀 있었다. 그 자리를 빨았더니 비릿한 피 맛이 날 뿐 가시는 꼼짝하지 않았다. 족집게를 찾아야 했지만 찾을 생각을 하니 피곤했다. 가시를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될까? 결국 저절로 빠질까? 아니면 영원히 남아 살이 될까? (p. 312)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조금 불편한 게 있었는지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좁은 건물 사이 때문에 쉽게 열지 못했던 창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종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면서 문득 밖을 내다본 시선 끝엔, 맞은편 집의 주방이 보였다. 가지런히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컵들이 자세하게 보일 정도로 건물과 건물 사이는 너무도 가까웠다. 창문을 열고 돌아서면서 한편으로는, 누군가 유리창 너머의 내 방을 지켜보고 있진 않을까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베스트셀러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쓴 피터 스완슨은 독특한 구조를 가진 아파트먼트를 배경으로 하여 '누군가 당신을 지켜볼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을 안겨준다. 단일적인 구조를 가진 기존의 아파트먼트와는 달리 안뜰 정원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 보는 구조의 아파트먼트는 압도적인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피터 스완슨은 케이트라는 주인공을 통해 그녀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버릴 수 있는 두려움들을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에 녹여낸다. 그녀의 일상을 무너뜨릴 만큼 거대한 두려움들은 모두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치 이 세상에 나쁜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는 투였다. 케이트의 아빠가 말했을 법한, 어리석지만 선의에서 비롯된 단언이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여자를 본 순간부터 누군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은 늘 그런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늘 최악의 결론을 도출한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 결론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p. 23)
케이트는 자신의 육촌인 코빈 델에게서 6개월 동안 아파트를 바꿔 살자는 제안을 수락해 보스턴으로 이사 오게 된다. 처음 방문한 보스턴이 주는 낯섦과 기존에 가지고 있던 불안 증세가 맞물리면서 그녀는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하게 된다. 더구나 이사 온 코빈의 옆집 여자 오드리가 실종되었다는 이야기에 케이트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트는 자신의 생각대로 오드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이웃사촌 앨런이 창문을 통해 오드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고, 실종된 오드리를 만나러 온 잭 루도비코, 자신의 육촌인 코빈과 오드리의 관계가 석연치 않음을 알게 된다. 과연, 오드리의 죽음은 이들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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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오드리의 집을 보고 있었던 건 당연하다. 살인 사건 현장이니까. 그도 분명 소문을 들었을 테고 궁금했으리라. 궁금하면서 불안했겠지, 아마도. 당연하다. 나쁜 일이 터지면 사람들은 늘 지켜보는 법이다. 케이트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p. 110)
피터 스완슨은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를 통해서 '집착'이 낳은 '욕망'에 대해서 서술한다. 어두운 곳에서 생겨난 욕망은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분출하게 되며, 이 소설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전에 만났던 조지로 인해 데이트 폭력을 경험한 케이트는 극심한 불안 증세에 떨게 된다. 사람이 많은 곳에 함부로 가지 못하며 답답한 곳에 머물게 되면 발현되는 공황장애에 힘들어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것은 유일하게 그의 모습이 나타나는 꿈 속이다. 꿈속에서 조지는 라이플총을 들고 다니며 케이트를 위협한다. 케이트는 언제 어디선가 그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 소설을 극적으로 끌고 가는 또 하나의 집착은 앨런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드러난다. 앨런은 흔히 말하는 '피핑 톰(Peeping Tom, 엿보기를 좋아하는 사람)', 즉 관음증 환자다. 그는 우연히 창문을 통해 보게 된 오드리의 모습에 사랑에 빠지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항상 창문에 앉아 그녀를 관찰하는 것이 그의 취미가 될 정도로, 그는 그녀에게 집착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기며 그녀와 친해질 궁리를 하기도 했다.
앨런은 거실이 더 어두워지도록 옆에 있는 램프를 끄고 여자를 계속 지켜봤다. 여자가 어찌나 평화롭고, 자기만의 작은 세상에 만족하는 듯이 보였는지 앨런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가슴이 찌릿하게 아플 정도로. 여자가 앉은 소파 반대쪽에 앉아 다리를 쭉 뻗어 서로의 맨발이 닿는 장면을 상상했다. 이 환상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완벽히 편안한 존재였다. (p. 75)
이 밖에도 피터 스완슨은 책에서 손을 뗄 수 없는 광기의 집착을 하나 더 보여준다. 광기의 집착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이 숨기고 있던 과거를 풀어내며, 자신의 감정들을 토로한다. 그리고 그 광기 속에서 얽히고 얽힌 인물들 간의 관계는 소설을 더욱 팽팽한 긴장감 속으로 밀어 넣는다. 다만, 그 팽팽한 긴장감이 짧은 사이에 풀어지면서 결말을 맞이한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범인에 대한 반전은 있었음에도 그 요소가 생각보다 강하게 오지는 않아 갑작스러운 결말에 조금은 실망했음에도 400페이지 가량 탄탄한 긴장감을 유지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아마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해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문득 누군가 우리 집을 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