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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 허난설헌 시선집
나태주 옮김, 혜강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평점 :

2학년 때, 우연히 고전 문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단군 신화부터 시작해서 삼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전기까지 고전 문학의 변천사를 훑어내는 수업이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시조, 한시가 창작되기 시작했다. 유명 사대부들은 시를 창작하면서 풍류를 읊어내고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나 지조, 절개를 표현했다. 당시 시대상으로 글 공부나 글 짓기는 남성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그에 비해 많은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한글 창제 이후, 쉽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그나마 창작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마저도 영역이 넓지 못해 여성 작가들의 수는 남성 작가들의 수보다 훨씬 적었다.
이매창, 황진이, 홍랑, 이옥봉, 그리고 난설헌 허초희 등 몇몇 여성 작가들의 작품들만이 지금까지 전해졌다. 이 모든 여성 시인들 가운데 시 작품의 편수로나 품격의 높이로나 발군의 시인은 허난설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는 그녀의 작품들을 모두 엮어 놓은 시선집이다.

허난설헌의 시 중에서 <연밥 따기 노래>는 인기리에 방영 중인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한 대사로 사용되면서 사랑받고 있다. 주인공 애신이 유진을 향해 물결처럼 일렁이는 자신의 마음을 연시로 표현했기 때문이었는데, 허난설헌의 시 자체에서 느껴지는 그 특유의 애절함이 유진을 향한 애신의 마음과 일치해 더욱 감성적으로 느껴진다.
연밥 따기 노래
가을날 깨끗한 긴 호수는
푸른 옥이 흐르는 듯 흘러
연꽃 수북한 곳에
작은 배를 매두었지요.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
멀리서 남에게 들켜
반나절이 부끄러웠답니다.

사실 허난설헌의 생애는 모두가 알다시피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녀 차별 없이 글 공부를 시켰던 부모님 덕에 좋은 재능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결혼을 기점으로 그녀의 삶에는 어둠이 드리워진다. 평탄하지 못한 결혼 생활 속에서 나이가 들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공부하는 남편과 글 재주가 뛰어난 허난설헌 사이에서는 트러블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시어머니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 (남편 김성립이 글 재주가 뛰어난 허난설헌에 대해 시기, 질투가 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그녀가 가진 아이들을 모두 먼저 보내게 되면서 그녀는 슬픔 속에서 요절하게 된다.
이런 기구한 운명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모든 감정들을 토로한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감정 호소는 여성에게 지조와 절개 등을 강요하던 조선 시대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에 띈다. 허난설헌의 작품들은 여성이어서, 여성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감정들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서 가질 수 있는 감정들을 담아낸다. 아이를 잃은 슬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절절한 고백, 사계절에 대한 노래 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들을 노래한다.
느낀 대로 1
창가에 놓아둔 난초 화분
난초꽃 벙글어 향기 그윽했는데
건듯 가을바람 불어와
서리 맞은 듯 그만 시들었어요.
어여쁜 모습 비록 시들었지만
여전히 코끝에 맴도는 난초의 향기.
마치도 시든 난초가 나인 듯 싶어
흐르는 눈물 옷소매로 닦아요.

《그대 만나려고 물 너머로 연밥을 던졌다가》의 실린 허난설헌의 시는 모두 풀꽃 시인이라 불리는 나태주 시인의 풀이로 되어있다.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시를 쓰기로 유명한 나태주 시인의 손을 거쳐서 그런지 허난설헌 시의 감성들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문득 잠이 오지 않는 가을밤, 다시 읽어보기 좋을 것 같은 시집이다.
마음에 있는 말 7
멀리서 나를 찾아오신 손님
당신이 보내오신 잉어 한 쌍을 주셨어요.
무엇이 들어있나 배를 갈라보았더니
그 속에 편지 한 장이 들었지 뭐에요.
첫 말씀을 '늘 보고 싶다'로 쓰셨고요.
그다음은 '잘 있느냐' 물으셨네요.
편지를 읽어가며 당신 뜻 알고는
눈물이 흘러서 옷자락을 적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