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
존 그린 지음, 노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내가 소설 속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때 나는 평일이면 인디애나폴리스 북쪽에 위치한 화이트 리버 고등학교에 다니는 중이었고,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이 학교에서 나보다 훨씬 거대하며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특정한 시간, 다시 말해 오후 12시 37분부터 1시 14분까지 점심을 먹어야만 했다. 만약 그 힘이 내게 다른 시간에 점심을 먹도록 정했거나, 나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내 운명을 서술하도록 도와주는 친구들이 그 9월 어느 날에 다른 대화 주제를 골랐다면 난 다른 결말을, 적어도 다른 중반부를 맞이했으리라. 하지만 삶이란 우리가 주인공인 이야기지 우리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나는 배워가고 있었다. (p. 9)

  영화 <안녕, 헤이즐> 원작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작가 존 그린이 돌아왔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헤이즐과 어거스터스를 통해 눈부신 첫사랑과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보여준 존 그린은 《거북이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의 에이자를 통해 다시금 그 감동을 느끼게 한다. 신체적 아픔 때문에 세상을 잿빛으로 바라보던 헤이즐과 비슷하게 에이자는 정신적 아픔 때문에 세상을 잿빛으로 바라본다. "내가 소설 속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을 때"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아이와 어른의 경계에 놓인 한 소녀가 자신을 찾아내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나선형으로 휘몰아치는 생각의 늪에 끊임없이 빠지면서도 소녀가 찾는 건, 그 생각의 끝에 머물러 있을 '진짜 자신'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녀의 삶의 주인공이라고 인식할 때까지는 그 생각의 끝을 결코 보지 못한다.





 "'네 이름은 알파벳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우른단다. 왜냐하면 넌 원하는 건 뭐든 될 수 있으니까.' (p. 43)"라며 아빠는 에이자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해줬던 아빠의 죽음 이후 에이자는 자신이 거대한 미생물 집합체라 여기며, 클로스토리움 디피실레나 캄필로박터균 등에 쉽게 감염될 것이라는 불안함과 강박증세를 안고 살아간다. 이 불안함과 강박증세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나선형 생각으로 표현된다. 내면의 목소리는 에이자를 계속해서 압박하며 조여들어간다. 그녀가 자유로이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넌 절대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는 생각했다.
  넌 네 생각을 선택할 수 없어, 나는 생각했다.
  넌 죽어가고 있고 네 안의 벌레들이 네 살까지 먹어치울 거야, 나는 생각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p. 105)

  작가 존 그린은 한없이 불안한 이 증세를 가진 10대 소녀의 심리를 굉장히 섬세하게 묘사한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에서 헤이즐이 어거스터스를 만나기 전과 후의 심리에 변화가 생긴 것처럼 에이자도 데이비스를 만나고 심리 변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에이자는 친구 데이지와 함께 데이비스의 아빠 러셀 피킷이 실종되었고,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렸다는 사실의 그를 쫓기로 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에이자가 데이지에게 끌려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러셀 피킷을 뒤쫓다 어린 시절 친구였던 데이비스를 다시 만난 에이자는 그와의 대화를 즐겁게 여긴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어쩌면 자신보다 더 지독하게 세상을 잿빛으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네가 첫사랑을 기억하는 이유는 네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음을, 이 세상에서는 오로지 사랑만이 가치 있음을, 사랑을 통해 그리고 사랑 때문에 네가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되었음을 첫사랑이 보여 주고 증명했기 때문이지. (p. 311)

  데이비스, 데이지, 그리고 엄마. 에이자는 그동안 생각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으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적나라하게 밝혀지는 순간에 일종의 안도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나선은 안쪽으로 따라가면 한없이 작아지지만, 바깥쪽으로 따라가면 한없이 커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 310)" 에이자는 작아지는 나선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그 끝에 있을 '거북이', 그러니까 '진짜 자신'을 보기 위해. 그리고 데이비스를 통해 그것을 마주하고 다시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오던 에이자는 넓어지는 나선 속에서 자신의 곁에 계속 있어주었던 데이지, 엄마를 보게 된다. 그렇게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던 소녀는 안정적이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간다. 
  에이자만이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생각의 소용돌이를 걷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그녀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저 미생물 집합체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충분하게 빛나는 사람이란 것을. 존 그린은 사랑을 그렇게 빗대었다. 내가 이 세상에 온전히 설 수 있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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