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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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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에 처했다면 이 몸의 손을 잡아라.
사람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어디선가 엄청난 힘을 가진 영웅이 나타난다. 최첨단 슈트를 입은 아이언맨, 거미줄을 쏠 수 있는 스파이더맨, 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슈퍼맨 등등.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곁에 나타나는 일명 '히어로'들은 사람들에게 늘 환영받는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들을 사용해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준다.
아이언맨처럼 최첨단 슈트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없는 초능력을 가지지도 못했다. 귀여운 너구리 가면과 벌레 먹은 구멍이 뚫린 고등학교 검은 망토, 지팡이 그리고 두 발. 거미줄과 초인적인 힘은 물론, 날지도 못하는 영웅이 교토에 나타났다. "곤경에 처했다면 이 몸의 손을 잡아라."라는 특유의 대사로 등장하는, 이름하여 '폼포코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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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포코 가면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작가로 알려진 모리미 도미히코의 신작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에 등장하는 영웅이다. "이 몸은 하치베묘진(너구리 신)의 사자이다."라고 스스로 말하던 괴인은 어느새 사람들에게 친절한 작은 영웅이 되어 있었다. 늘 바쁘게 교토를 돌아다니며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던 폼포코 가면은 이제 자신을 이을 2대 폼포코 가면을 선정하기로 한다.
교토 교외에 있는 모 화학기업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청년 고와다는 폼포코 가면에게 2대 폼포코 가면으로 선정된다. 내면의 게으름뱅이를 존중하는 고와다는 자신을 따라다니며 폼포코 가면이 되기를 권하는 폼포코 가면이 귀찮기만 하다. 사실 그는 골수 게으름뱅이라고 불릴 정도로, 주말마다 기숙사에 틀어박혀 늘어지게 잠을 자거나 '아내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 목록'을 만들면서 그저 쉬고 싶어 하는 직장인에 불과하다.
"누가 좋아서 정의의 사도 따위를. 나는 굳건하게 내 휴일을 지켜낼 거예요. 게으름 피울 수 있다면 뭐든 할 겁니다." (p. 50)
모리미 도미히코는 필자로서 작품에 개입한다. '모험'에 대한 자신만의 소신을 밝히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을 마치 독자와 함께 관찰하는 느낌으로 묘사한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서술 방식은 독자들이 작품 밖에 위치하도록 만듦으로써 소설 전개 과정을 꽤나 흥미로운 시선으로 관전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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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웅의 정점에 도달한 폼포코 가면은 이내 영웅이라면 한 번쯤은 겪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폼포코 가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그를 조여들어오는 탐정 우라모토와 조수 다마가와의 수사망에 더불어 그를 뒤쫓는 피라미드 단계의 거대한 조직들까지. 주변에 적들이 생겼음에도 폼포코 가면은 자신의 소신을 지켜가며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다.
"곤경에 처했다면 이 몸의 손을 잡아라."
폼포코 가면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이 이 몸의 일이 아니었던가?" (p. 129)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은 총 3가지의 사건이 동시에 진행된다. 고와다가 폼포코 가면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제2의 폼포코 가면이 되어 영웅으로 활동할지, 폼포코 가면의 정체는 무엇인지, 또 폼포코 가면을 쫓는 피라미드 단계의 거대 조직의 정체는 무엇인지에 대해 독자들은 모리미 도미히코의 부연 설명과 함께 추리하게 된다. 높은 가독성만큼 몇몇의 사건들은 빠르게 진행되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더구나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은 교토의 지역 축제인 요이야마가 열리는 토요일 하루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으면서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에 독자들도 함께 들뜨며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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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끝나면 어쩐지 마음이 허전해져. ……하지만 나는 이 허전함이 좋아. 축제 뒤의 허전함이 있기 때문에 축제인 거니까." (p. 415)
축제가 끝나고 모험 같았던 고와다의 토요일도 끝이 난다.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늘어지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주말은 어쩌면 축제가 끝난 뒤의 허전한 마음 같은 게 아닐까. 떠들썩하고 바쁘게 살아온 평일을 뒤로한 채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그 소중한 시간. 모두들 내면의 게으름뱅이를 위해 느긋한 토요일 아침에 《거룩한 게으름뱅이의 모험》을 집어 드는 것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