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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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몽에서 깨어나 안도의 한숨을 쉰다. 이 모든 것이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이내 언제 악몽을 꾸었냐는 듯 다시 잠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뒤숭숭함에 다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모든 게 허상에 지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이런 느낌 때문일까, 우리는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은 끔찍한 상황을 '악몽'이라고 표현한다. '차라리 꿈이었으면'이라는 가정은 더욱 그 현실을 더 끔찍하고 비참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패트릭은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바늘이 어깨뼈 밑으로 슬쩍 들어가 가슴으로 나오는 것을 느꼈지만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굵은 실이 낡은 자루처럼 폐를 꿰매 숨을 쉴 수 없었다. 얼굴에 말벌이 어른거리는 것 같은 공포에 홱 머리를 숙이고 몸을 비틀고 허공을 휘저었다. (p. 209)

  에드워드 세인트 오번의 자전적 소설 패트릭 멜로즈 5부작, 그 첫 번째 이야기인 《괜찮아》는 주인공 패트릭의 유년 시절의 한 페이지를 보여준다. 패트릭에게는 악몽 같은 끔찍한 하루를 통해 그가 즐겁고 유쾌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괜찮아》는 단순히 패트릭 멜로즈의 불우한 유년시절뿐만 아니라 아버지 데이비드 멜로즈와 그의 지인과의 관계 속에서 뒤틀린 영국 상류층의 모습을 묘사한다. 인물들이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속내와 그 사이에서 생기는 경멸, 혐오, 두려움 등의 감정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책장으로 다다르게 된다.

  앤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그런 가치관에 대한 빅터의 상반된 태도였다. 앤은 빅터가 이중 스파이인지, 빛바랜 상류층의 본보기일 뿐인 멜로즈 부부 앞에서 자기가 그들의 무위도식하는 인생을 헌신적으로 흠모하는 사람인 체하는 진지한 작가인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앤에게는 그들 세계의 주변부에 편입되는 뇌물을 받아먹지 않은 체하는 삼중 스파이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p. 148)






여기 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해.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될 텐데, 패트릭은 생각했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될 텐데. (p. 45)

  5살 패트릭의 악몽 같은 하루는 그의 아버지 데이비드로부터 시작된다. 데이비드는 아들 패트릭에게 교육을 이유로, 굉장히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아버지의 부름에 두려워하는 패트릭의 모습을 보면 평소에도 그가 결코 아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데이비드는 패트릭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에게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5살 남자아이는 그날,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게 된다. 
  데이비드는 아내 엘리너도 소유한 것처럼 대하는데, 결혼 초에 그녀에게 느끼고 있었던 정복욕을 실현시키고는 이내 시시함을 느낀다. 엘리너는 영국의 이류 속물들과는 다른 듯한 데이비드의 매력에 빠져 그와 결혼을 했지만, 점차 자신을 험하게 다루는 데이비드 모습에 술과 약을 선택하며 몽롱하게 살아가기로 한다. 아버지의 냉담과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서 패트릭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간다.

   데이비드는 밤늦게 돌아와 계단에 앉아 있는 패트릭을 발견하면 육아실로 가라고 명령하곤 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든 뒤 층계참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었다. 그러면 패트릭이 몰래 제 엄마 방에 갔다는 걸 알았다. 인사불성이 되어 몸을 웅크리고 침대 가장자리에 누운 엄마의 무감각한 등에서 위로를 얻으려 할 것이란걸.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그들은 대기실치곤 사치스러운 방의 피난민 같았다. (p. 156)







  패트릭은 도마뱀붙이를 향해 자신을 투척했다. 두 주먹을 꼭 쥐고, 정신 집중이 자기와 도마뱀붙이를 연결하는 전화선 같아질 때까지 정신을 집중하고 도마뱀붙이 몸속으로 사라졌다. (p. 112)

  《괜찮아》를 읽으면서, 굉장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에드워드 세인트 오번이 패트릭의 감정들을 동물에 투영시킨다는 점이었다.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던 패트릭은 열린 창문의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도마뱀에 자신의 영혼을 투영시킨다.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픈 자신의 간절한 마음은 도마뱀붙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비 온 뒤 달팽이를 으깨 죽이는 건 공평하지 않았다. 달팽이는 물방울을 흘리는 잎 아래 생긴 작은 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뿔을 뻗고 놀기 위해 나올 따름이었으니까. 뿔에 손을 대면 달팽이는 뿔을 움츠렸고 패트릭고 덩달아 손을 움츠렸다. 달팽이에게 패트릭은 어른과 같았다. (p. 31)

  소설의 도입부에서 에드워드 세인트 오번은 달팽이를 통해 패트릭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암시한다.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한 패트릭에게 부모의 냉담과 무관심은 마치 우산으로 짓이겨진 달팽이와 같은 처지로 전락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아버지의 부름에 두려워하며 다가가던 패트릭의 모습은 마치 손을 대자 움츠리던 달팽이의 뿔 같아 보였고, 우산으로 짓이겨진 달팽이의 모습은 상처와 아픔으로 뒤덮여진 패트릭의 유년 시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괜찮아》라는 제목의 의미는 유년 시절을 어루만져 주지 않았던 어른들의 부재에 대한 위로가 아니었을까. 이 악몽 같은 하루에서 패트릭 멜로즈는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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