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
필립 한든 지음, 김철호 옮김 / 김영사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스무 살. 처음으로 떠나는 기차 여행. 이 두 단어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으로 배낭 안에 짐들을 넣기 시작했다. 여행 내내 갈아입을 옷, 잘 하지도 못하는 화장을 하겠다며 빵빵하게 가득 채운 파우치, 난생처음 갖게 된 DSLR 등등. 거북이 등껍질처럼 부풀어 오른 배낭을 메고 나는 호기롭게 여행을 떠났다. 7월의 한낮은 가만히 서 있어도 등을 타고 땀이 주르륵 흘렀다. 배낭을 메고 있는 부분은 통풍도 잘 되지 않아 더위를 고스란히 껴안고 있는 셈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지친 어깨와 목은 딱딱히 뭉치기 시작했다. 호기롭게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배낭 자체를 던져 버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내 생의 첫 기차 여행은 배낭과의 씨름으로 기억되었다.
  그 이후의 여행도 다를 건 없었다. 여전히 나는 배낭이나 캐리어를 짐으로 가득 채웠고 여행 중에 '이 물건을 왜 가져왔을까'라는 의문을 남길 정도로 종종 쓸모없는 것들을 담기도 했다. (무언가에 대비해서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은 가끔 너무 많은 것을 챙기도록 만든다.) 이번 상하이 여행을 다녀오면서 한 손에 집어 든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은 나를 뜨끔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나는, 자유로운 여행자가 아니었다.

  '가볍게 떠나기'라는 말의 의미를 떠올려보자. 짐 없는 여행, 한 장 나뭇잎처럼 단아하게 걸어가는 인생길. 이런 것은 어떨까? 우리 인생 여정에서 함께하는 빛, 길을 밝혀주는 빛. 가벼운 여행길.
  한 장 나뭇잎처럼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네 삶을 소박한 여행처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짐이 없고 복잡하지 않고 산만하지 않은 여행, 집중과 의식의 여행이란 무엇일까? 가벼움과 빛의 여행이란 무엇일까? (p. 13)

  《자유로운 여행자의 소지품 목록》은 저자 필립 한든이 여러 해 동안 '소박한 여행'과 관련한 목록들을 수집한 것들을 엮은 책이다. 그는 우리가 늘 생각하듯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가는 것을 여행으로도 정의하지만 한 날에서 다른 날로 가는 것, 탄생에서 죽음으로 가는 것도 '여행'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때로는 여행자들이 직접 가방에 들고 있던 것들을, 또는 여행자들이 머물렀던 공간, 여행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놓는다. 필립 한든은 이 목록들을 그저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처럼 적어 놓는다.

  페이지를 열 때마다 마치 잠든 아기에게 다가가듯 느리고 고요하게 다가가길 바란다. 이 책은 누구라도 하룻밤 새에 읽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얄팍하지만, 그러면 여러분이 마땅히 누려야 할 휴식을 잃고 만다. 이 책의 갈피갈피에는 여러분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고, 당신에게 던지는 물음이 있다. 우리의 여행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우리는 여행을 떠나며 무엇을 남겨놓는가?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떠나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길을 찾을 수 있는가? (p. 16)

  필립 한든이 선정한 여행자들의 기준은 굉장히 다양하다. 실존했던 작가, 미술가, 순례자는 물론이고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가 뽑은 여행자에 해당된다. ('북극제비갈매기'는 사람으로 칠 순 없겠지만) 40여 명에 달하는 여행자들의 소지품 목록은 그만큼 제각각이다. 그들이 평소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필립 한든의 설명을 읽고 그들의 소지품 목록을 읽는 순간, 모든 것이 딱 들어맞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여행자 개개인들의 성격은 고스란히 그들의 소지품 목록에서 드러난다.
  많은 여행자들의 소지품 목록을 보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마르셸 뒤샹의 주말여행 소지품 목록이었다. 그 누구보다 간단했던 그의 소지품 목록은 '짐가방은 절대 사절 / 두 겹으로 껴입은 셔츠 / 재킷 주머니에 칫솔 하나(p. 30)'였다. 재킷 주머니에 칫솔 하나라니. 이보다 더 가벼운 여행 소지품 목록을 본 적은 없었다.

  "한 바퀴 도는 원은 완성되었지만, 나는 온전히 돌지 못했다. 나는 그 기나긴 여정을 통해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p. 112 윌리엄 '리스트 히트 문'의 소지품 목록 중)

  여행자들은 가벼운 짐만큼 자유로이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가벼이 들고 간 가방에 자신이 여행에서 깨달은 것들을(그것이 구체적이지 않아도) 하나씩 담았다. 다음 여행에는 가벼운 짐을 들고 떠나볼까 한다. 그리고 여행에서 깨달은 것들로 내 가방을 가득 채워야겠다. 일상의 소중함이라든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만난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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