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이름은 어떤 것을 규정한다. 나에게는 여러 개의 이름이 있다. 나를 부르는 이름은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한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세 글자의 이름 말고 누구의 '딸'로 불릴 때도 있고, '여대생 누구'로 불릴 때도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의 이름은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 여직원, 아줌마, 할머니 등등. 그리고 이 모든 이름들은 '나'를 규정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모든 이름들이 '나'만 규정하지는 않는다.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한민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던 조남주 작가는 《그녀 이름은》이라는 새로운 소설집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이 《그녀 이름은》의 화자들은 모두 '여성'이다. 아홉 살 어린이부터 예순아홉 할머니까지 육십여 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쓰인 이 소설집은 우리 주변의 이야기들을 담아낸다.

흔하게 일어나지만 분명 별일이었고 때로는 특별한 용기와 각오, 투쟁이 필요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자체로 의미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특별하지 않고 별일도 아닌 여성들의 삶이 더 많이 드러나고 기록되면 좋겠습니다. 책을 펼치며 여러분의 이야기도 시작되리라 믿습니다. (p.7 '작가의 말' 중에서)

"특별히 해줄 말이 없는데", "내가 겪은 일은 별일도 아닌데"라며 덤덤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여성들처럼 《그녀 이름은》의 소설들은 하나의 일상처럼 느껴진다.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의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의 '할머니'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숨 쉬고 잠자고 밥 먹는 것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야기 속에는 어떤 이름으로 규정된 여성들이 등장한다. 마치 핀에 꽂혀 더 이상 날지 못하게 된 박제된 나비처럼 여성들은 그 이름으로 규정되어 멈춰있다.

"결혼해. 좋은 일이 더 많아. 그런데 결혼해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말고 너로 살아." (p. 90 '이혼일기' 중에서)

《그녀 이름은》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은 '엄마'였다. 나보다 더 많은 이름을 가진 우리 엄마. 내가 더 어렸을 때, 엄마는 나에게 문득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나마 엄마가 직장을 다니니까 내 이름 석 자로 불리는 거지."라고. 결혼을 생각하지도 않았던 엄마는 할머니의 소원이라는 말에 결혼을 택했다. 엄마에게는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리고 나와 동생이 태어나니 누구의 엄마라는 이름도 생겼다. 그 이후로 엄마는 본인 이름 석 자보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았다.

"나는 엄마가 자랑스러워. 항상 그랬고 지금도 그래." (p. 244 '큰딸 은미' 중에서)

나를 표현해주는 이름이 생기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만큼 나를 더 알릴 수 있으니까. 그러나 때로는 '나'의 이름이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아 불편하다. 진짜 내 이름을 덮어버리고 그 이름으로 박제되어 살아야 할까 봐 불편하다. 《그녀 이름은》에는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소진, 나리, 은순, 지혜, 민아, 유경, 은미, 수빈…… 나는 '나'의 이름이, 그리고 '그녀'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불렸으면 좋겠다. 온전한 제 이름으로 불렸으면 좋겠다.

십삼년 전 삼순은 말했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서른을 앞둔 은순에게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일들이 많다. 매장에 나갈 때도 교육을 받을 때도 남자친구를 만날 때도 그렇다. 좋은 영화를 보고 예쁜 옷을 입고 상쾌한 향수를 뿌릴 때도 그렇다. 심장이 딱딱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촌스러운 이름, 버거운 일상, 불안한 미래, 하지만 계속 두근거릴 줄 아는 김은순으로 살고 싶다. (p.61 '내 이름은 김은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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