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 홍승희 에세이
홍승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5월
평점 :

길을 걷다 보면 종종 사색에 빠진다.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를 곱씹어 보기도 하고, 주변을 느리게 관찰하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에 다시 걷는 데에 집중한다. '지금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항상 그러지는 않지만 때때로 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하는 행동이 타인에게는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한 번 사로잡히면 그날은 왠지 모르게 타인의 눈이나 표정에 집중하게 된다. 심지어 스쳐 지나가는, 어쩌면 한 번 보고 말게 될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타인의 시선이나 기준을 신경 쓰다 보면 어느새 그것에 얽매여 부자연스러운 '나'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웃긴 것은, 그 순간에도 나는 '이 모습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라며 또다시 타인의 시선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의 저자 홍승희는 그런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녀의 삶에서 가장 우선이 되는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다. '남들은 이해 못하겠지만'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그녀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실행한다. 불우한 가정 환경, 몇 번의 자살시도로 찾아온 우울증으로 인해 글들은 한없이 어둡게 느껴지지만 그 속에서 그녀는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한다.
삐뚤빼뚤한 나무는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존중받지 못한다. 열매나 잎사귀가 영원히 열리지 않아도 까마귀가 앉았다 갈 수 있는 나뭇가지인데. 그림까지도, 삐뚤빼뚤한 고유의 선마저도 병리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움이 될 수 없을까.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자기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패배자라고 말하는 이 세상처럼 상담사는 나의 볼품없고 깡마른 나뭇가지를 패배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패배가 뭐 어때서. 성공이라는 진통제로 오늘을 죽은 것으로 남기는 것보다 오늘 자기 의지로 죽는 패배자가 낫지 않나요. (p.112)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를 읽다 보면 세상에는 너무 많은 잣대가 있음을 실감한다. 어떤 동물이든 간에 인간들에 의해서 고통받는 것이 싫어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규정짓는 관계에 얽매이기 싫어 비독점 다자연애를 하게 되었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자신의 몸 위에 자유롭게 타투를 새기는 등 저자 홍승희의 이야기는 그 많은 잣대들이 개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강요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의 이야기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그녀를 자신의 잣대에 맞춰 아니꼽게 바라보는 타인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쾌한 감정을 바탕으로 툭툭 한 마디씩 내뱉는다.
출생률, 사망률을 관리하는 국가 아래서 몸은 이래저래 감시받고 관리된다. 버림받지 않으려면 건강해야 하고, 표준의 외투를 입고 있어야 한다. 몸무게를 늘리거나 빼고, 통증을 피하거나 숨기면서, 사람들의 고유한 피부색과 밀도만큼이나 다양한 몸들은 사라진다. (p.212)
그래서 ≪세상은 내가 이상하다고 한다≫ 중 외국 친구에게 읽지도 못하는 한국어로 정성스레 편지를 써주었다는 <당신은 모른다>는 굉장히 와닿는다. 타인과 내가 서로 무지해 그 무엇도 나눌 수 없는 사이라면. 타인이 강요하는 잣대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해 그 무엇도 상처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정직한 무지가 서로를 가깝게 한다. 우리에겐 더 많은 언어가 아니라 더 많은 무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는 무지. 나는 나를 모르듯 당신을 모른다. 삶이 뭔지 세상이 뭔지 몰라서 여기저기 걸어 다닌다. (p.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