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기담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5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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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사진 한 장으로 과거의 전생과 연결된다는 이야기,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오므라이스를 먹는 손님의 이야기, 여자친구를 만들 수 있는 캔 통조림에 관한 이야기 등등. 내게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어쩌면 이 세상 어디에서 일어날 법한 그런 이야기들을 그려내어 굉장히 매력적인 드라마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기담집≫은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와 어느 정도 비슷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신기한 일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별 볼 일 없는 소소한 쪽의 체험만을 다룰 것이다. 내 인생을 바꾼 신기한 일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가는 지면의 대부분을 다 써버릴 것 같으니까."라며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연 여행자', '하나레이 해변',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 '시나가와 원숭이'라는 제목의 총 다섯 편의 이야기들을 선보인다. 

  우연의 일치라는 건 어쩌면 매우 흔한 현상이 아닐까라고요. 즉 그런 류의 일들은 우리 주위에서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하지만 그 대부분은 우리 눈에 띄는 일도 없이 그대로 흘러가버리죠. 마치 한낮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희미하게 소리는 나지만 하늘을 올려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분명 우리 시야에 일종의 메시지로서 스르륵 떠오르는 거예요. (P.42)

  다섯 편의 이야기들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든다. 카페에서 만난 여자로 인해 문득 누나가 떠올라 연락하니 누나와 그 여자의 상황이 다르지 않았던 남자의 이야기(우연 여행자),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을 하다 상어에게 다리를 잃고 사망한 청년의 어머니의 이야기(하나레이 해변), 24층과 26층 사이의 계단 중간에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남편을 찾는 아내의 이야기(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일생 동안 만날 수 있는 운명의 여자는 세명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자라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해 말해주는 남자의 이야기(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여인의 이야기(시나가와 원숭이)까지.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과연 어디까지가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인지에 대해 곱씹어 본다.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있는 법이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써 내려간 이 다섯 편의 이야기들이 픽션이라고 확신하기 어려워진다.

 


  내 이름만 찾으면 그걸로 됐어요. 나는 거기에 담겨진 것들과 함께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갈 거에요. 그게 내 이름이고 내 인생이니까요. (p.211)

  다섯 편의 이야기 모두 흥미로웠지만 그중 가장 눈길이 갔던 이야기는 '시나가와 원숭이'였다. 미즈키가 이름을 자주 잊어버리게 된 건 결혼 후 '안도 미즈키'라는 이름을 얻고 일 년이 지나서부터였다. 주소나 전화번호를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가장 흔히 쓰는 이름을 잊어버리다니. 그녀는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 이름이 적힌 은팔찌도 착용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병원을 찾아다녀도 좋은 방법 하나 찾지 못하던 중, 구청에서 '마음의 고민 상담실'에 등록한다. 
  사실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 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준다.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도, 줌파 라히리의 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에서도 이름이 주는 힘은 대단하다. 이름으로 하여금 살아있음을 느끼고 내 삶이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시 이름을 찾은 미즈키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 생각한다. 그저 글자로 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그것이 좋은 부분이든 나쁜 부분이든 간에.

  그녀는 앞으로 다시 그 이름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일이 잘 풀릴 수도 있고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게 바로 그녀의 이름이고 그밖에 다른 이름은 없는 것이다.(p.214)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인 ≪버스데이 걸≫을 읽었을 때도 그 짧은 단편 속에서 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가 깊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쉽고 빠르게 읽혔지만, 그 속에 함축되었던 것들을 정확히 콕 집어 설명하기는 어려웠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도쿄기담집≫ 역시 쉽고 빠르게 읽혔다. 그 어디에도 군더더기 하나 없는 하루키의 문장들을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책장을 읽고 있다. 그래도 ≪버스데이 걸≫보다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요지를 찾는 데에 조금 더 편안한 책이었다. 
  다섯 편의 기묘한 이야기들이 주는 왠지 모를 따뜻함과 뭉클함은, 하루키 문학의 감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말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그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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