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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칼이 되어줘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김진석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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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담아 쓰는 편지의 힘은 그 어떤 매체보다 강하다. 타자로 쳐내어 너무 바르게 쓰인 글씨에서 딱딱함이 묻어 나오는 이메일이나 장문의 메시지보다 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전하기에 효과적이다. 단어 하나 고르는데 고심하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그렇게 차마 타인의 두 눈을 보고하지 못할 말들을 편지를 통해 전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고, 너에게 이 생각을 이렇게 전하고 싶다'라는 나의 바람은 종이 위 동글동글한 나의 손글씨들로부터 조금씩 뭉개져 나온다.그동안 내가 말하지 못했던 진짜 '나'의 모습을.
≪나의 칼이 되어줘≫는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로 2017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다비드 그로스만의 작품이다. 그는 9개월의 시간 동안 오로지 편지만을 통해 대화하는 남녀의 모습을 그려낸다. '편지'의 특성상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매체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설 방식에서는 두 사람의 감정선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도록 교차로 진행하여 독자들의 혼란을 경감시키는 데에 반해 ≪나의 칼이 되어줘≫는 기존의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구성 방식을 취한다. <1부>는 야이르가 밀리엄에게 쓴 편지만으로, <2부>는 밀리엄의 일기로, <3부>는 야이르와 밀리엄의 전화 통화로 이루어진다. 야이르의 편지만을 읽으면서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 있지만, 밀리엄의 일기와 두 사람의 전화 통화까지 모든 페이지를 다 읽는다면 그 혼란스러움은 조금씩 가라앉는다.
야이르는 모임에서 처음 만난 미리엄에게 이유 모를 이끌림으로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의 이름도, 주소도, 전화번호도 언급하지 않은 채 편지를 쓰던 야이르는 미리엄에게 오는 답장에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그는 아내 마야에게도, 아들 이도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에 대하여 미리엄에게 모두 털어놓는다. 야이르가 미리엄에게 편지를 쓰는 동안만큼은,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 야이르는 부모님의 무관심으로 스스로 고아라고 여겼던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오는 외로움과 불안, 결혼생활에서 오는 답답함에 대해 미리엄에게 이야기한다. 동정과 연민으로 시작된 미리엄의 답장에서 야이르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완전히 낯선 두 사람이 그 낯섦 자체를, 이질성이라는 강력하고 뿌리 깊은 원칙을, 우리 영혼에 깊숙이 자리 잡은 모든 비대한 권력들을 극복하게 해달라고요. 우리는 진실의 혈청을 주사 맞은 사람처럼 마침내 지실을 털어놓게 될 거예요. 난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해요. "난 그녀와 함께 진실의 피를 흘렸다"라고. 그래요,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그거예요. 나의 칼이 되어주세요. 그럼 맹세코 나도 당신의 칼이 되어 줄게요. 예리하지만 연민이 깃든, 내 것이 아닌 당신의 단어들로요.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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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을 때는 무슨 말인지 정말 이해를 못 했어요. 단어 하나하나에서 굉장히 눈부신 빛이 환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니까, 당신도 '나'라는 글자의 깊이를 헤아려본다면 이해하는 순간이 있을 거예요. 그 글자의 중심에서 거무스름한 어둠 같은 것이 퍼져 나오며 나를 그 속으로 빨아들이죠. (p.16)
당신의 문장, 그 문장의 조각들이 마치 오랜 기차 여행을 마치고 난 뒤의 여음처럼 머릿속에서 윙윙거려요. 외워서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을 정도로요. 물론 당신이 얼마쯤 잊어버렸다면 더 좋을 거예요. 대체로 난 우리 관계가 말 때문에 가로막히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저 단순히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p.344)
편지를 통해 서로의 단어와 문장을 탐닉하던 야이르와 미리엄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사랑은 인간이 타인에 대해 흔히 가질 수 있는 감정인 동정과 연민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넘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 야이르는 어린 시절의 어두운 기억으로 자신을 몹시 비난하지만, 미리엄은 그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에 대해 답을 함으로써 야이르가 그 상처에 다시 대면하도록 도와준다. 한편, 미리엄을 모임에서 보았을 때 야이르는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그녀의 내면의 슬픔을 알아차린다. 아픈 친구의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미리엄은 야이르보다 더 현실적인 고민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야이르는 그녀를 잠시나마 그 고민으로부터 벗어나고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칼이 되어 스스로를 괴롭혀 왔던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떼어내어 마주한다.
그러나 미리엄에게 편지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던 야이르는 어느 날, 자신이 보고 싶어 찾아온 미리엄에게 질색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않겠다며 선언한다. 미리엄을 통해서 나 자신을 마주했지만, 혹여나 미리엄에게 진짜 '나'의 모습을 보일까 한없이 두려워하는 야이르의 모습은 약해 보인다. 미리엄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지만 야이르가 가명을 쓴 것도, 주소와 전화번호를 밝히지 않았던 이유는 그에게는 자신의 상처가 타인의 두 눈에 그대로 비칠까 두려웠던 것이었다. 야이르는 그 두려움에 의해 편지 쓰기를 멈췄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미리엄에게 전화를 건다. 미리엄을 극적으로 만나게 된 야이르는 빗속에서 벌거벗은 채 괴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미리엄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자신 내면의 상처에 대한 울분을 터뜨리며 불완전한 자신의 자아를 받아들인다.
세세한 것들은 정말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얼마나 많은 직업을 전전했고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당신에게 말한 적이 없어요. 그래도 결국에는 천직을 찾았다고 생각했어요. 책을 다루고,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애지중지했던 이야기를 되찾아주는 일이니까요. 어떤 일이 이보다 더 내게 적합할까요? 분명히 말은 틀렸어요. 난 현재 상황에 겨우 만족할 뿐이에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책들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예요. 어째서 나를 둘러싼 수천 권의 책들조차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 어떤 것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요.
그리고 그 어떤 책도 당신의 편지가 내게 전한 것들을 주지는 못했어요. (p.336)
타인을 통해 불완전한 나를 바라보고 그것을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은 조금 아프다. 그럼에도 누군가 나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는 한없이 기쁘고 감사하다. 오늘도 종이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써 내려가며 불완전하지 못한 나를 보듬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