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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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찾아왔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나 거리를 가득 메우고 벌거벗은 나뭇가지들 위로 파릇파릇한 새 잎들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이 잎들이 자라나 장맛비에 하나, 둘 톡톡 젖어 들어갈 때, 거리 곳곳을 메울 풀 내음에 아마 나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가장 많이 떠오를 것 같다. 여름의 무더위만큼 열정 깊은 무라이 설계사무소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열정의 여름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를 쓴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의 데뷔작이다.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에서도 삶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오래된 고택에 대해 말하던 마쓰이에 마사시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는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건축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펼친다. 

  먹고 자고 사는 곳이라고 한 것은 참 적절한 표현이야. 이들은 뗄 수 없는 한 단어로 생각해야 돼. 먹고 자는 것에 관심 없이 사는 곳만 만들겠다는 것은 그릇만 만들겠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나는 부엌일을 안 하는 건축가 따위 신용하지 않아. 부엌일, 빨래, 청소를 하지 않는 건축가에게 적어도 내가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 (p.106)

  대학을 막 졸업한 사카니시 도오루는 무라이 설계사무소에 들어간다. 무라이 설계사무소는 지난 3년간, 신입 직원을 뽑지 않았지만 사카니시는 무라이 설계사무소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자신이 설계한 휠체어가 있는 집에 대한 설계도를 보낸다. 무라이 선생과 면접을 본 사카니시는 다른 경력자들을 제치고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무라이 설계사무소는 여름마다 도쿄를 떠나 가루이자와의 여름 별장에서 일을 진행한다. 여름 별장에 처음 간 사카니시는 곳곳에 무라이 선생의 손길이 깃든 공간에서 누구보다 건축에 대한 열정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에 만족한다.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에 무라이 설계사무소 사람들도 참여하게 되면서, 무더운 여름날의 추억이 쌓이기 시작한다.

 

 

 

 

 

 

간단하고 간결하다는 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지.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저절로 알 수 있으니까 말이야. 건축에서 사소한 장치를 생각할 때도 사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그 장치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거야. 취급 설명서 따위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우위라고. (p.114)

  그동안 건축의 영역은 크게 외관과 내부 공간의 틀을 만들어 내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실내 건축 분야라고 해도 내부 구조에 맞게 아름다운 정도로만 디자인하는 것이 전부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가구의 손잡이, 일어서고 앉을 수 있는 의자 사이의 여유 공간 등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무라이 선생의 손끝에서 생명이 깃들기 시작한다. 무라이 선생은 그 어떤 부분보다도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인 것을 중요하게 여겨 사람이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움직이며 말 그대로 '생활'할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을 만드는 데에 집중한다. 공간을 메우는 가구들의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쓰면서 누구보다 사용자에게 맞춰 있는 무라이 선생의 건축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선생님의 국립현대도서관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대로 흘러, 지나간 세월은 이 모형에 사소한 숨결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 플랜의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선생님 플랜에 생명이 불어 넣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p.415)

  무라이 설계사무소 사람들이 쏟은 더운 열정에 비해 국립현대도서관 경합에서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 경합 준비의 끝자락에 무라이 선생이 쓰러지고, 무라이 설계사무소 사람들은 하나둘씩 치열하고 뜨거웠던 여름의 가루이자와 별장을 떠난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 무엇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여겼던 무라이 선생의 건축은 사카니시의 마음속에서 생명을 얻고 오래도록 기억된다. 생명이 깃든 곳을 만들고자 했던 무라이 선생의 건축은 타인의 마음에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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