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런하우스 - 너에게 말하기
김정규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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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쉽게 말하지 못했던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가끔 길을 걷다 어린 친구들의 대화를 들을 때가 있다. 너무도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귀여우면서 혹시나 그 말을 듣는 친구가 기분이 상해버리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진다. 그러나 대게 그 걱정은 오로지 나의 성급한 판단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툭 터놓고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그 누구 하나 심히 불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타인에게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모든 감정을 '괜찮다'라는 말로 포장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괜찮다'라는 세 글자는 타인과의 감정 상호작용을 방해하는 나의 큰 단점이 되었다.

  오늘날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며 사는 도시의 삶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생각에 치료공동체를 구상하게 되었으며, 뉴런하우스란 이름은 신경 세포처럼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살아있는 생명체, 살아 있는 공동체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지은 것이라고 했다. (p.14)

  ≪뉴런하우스≫는 8명의 사람들이 모여 살며 정기적으로 '창문 닦기 대화모임(창모)'를 열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간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독일에서 살고 있던 심리치료사 영민은 메일 한 통을 받게 된다. 한국에서 '뉴런하우스'라는 셰어하우스 형식의 치료공동체를 운영하고자 하는데 그곳의 담당 치료사로 1년간 머물러 달라는 제안이 담긴 메일이었다. 평소 한국 사회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영민은 뉴런하우스 프로젝트를 굉장히 흥미롭게 여기고 그 제안을 수락한다. 
  뉴런하우스에는 영민을 제외하고 남자 4명, 여자 4명이 입주했고 영민의 제안에 따라 그들은 이름이 아닌 서로의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평화, 바위, 오아시스, 새벽, 봄비, 수선화, 햇살, 바람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묻어둔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창모를 통해 자신의 속마음들을 하나씩 드러내던 그들은 가족, 형제처럼 끈끈한 공동체를 완성해가기 시작한다.

  나부터 창문을 다시 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입견을 갖고서 한 인간을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니 천박한 일인지 새삼 옷깃이 여며지는 느낌이다. '서릿발같이 깨어 있어야만 하겠구나.'란 생각이 든다. (p.104)

  ≪뉴런하우스≫는 저자 김정규가 심리치료사로서 만난 환자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집필된 팩션(faction) 소설이다. 소설을 통해 물질주의와 경쟁 사회의 어두운 이면인 인간 소외 문제를 다루고, 나아가 대안적인 삶을 제시해보고 싶었다는 그의 바람은 ≪뉴런하우스≫에 고스란히 녹아져있다.

  사람들이 '뉴런하우스'라는 셰어하우스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면서, 그리고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아픔을 해결하기를 바랐다. (p.6 '작가의 말' 중에서)

  그래서 ≪뉴런하우스≫에서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지만 이 공동체적 삶을 이루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창문 닦기 대화모임'이 따른다. '창문 닦기'란 자신에 대한 이해로, 타인을 이해하기 전에 자기 자신부터 이해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심리치료사 영민의 질문에 따라 차근차근 자신의 감정을 내뱉었던 8명의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을 먼저 이해하게 되고 더 나아가 타인의 감정까지 공감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감정을 쉽게 터놓지 못했다. '힘들다'라는 말을 꺼내면 '너만 힘드냐, 나는 더 힘들다'라는 답변을 받는 게 익숙해지자 사람들은 그저 감정의 응어리들을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는 한국인만의 독특한 질병인 '화병(hwa-byung)'이 있다. 미국 정신의학회에 우리나라 말 그대로 등재될 정도로, 감정의 응어리를 풀지 못하는 한국인들은 유독 마음이 아프다.

  뚜렷한 이유가 없는 막연한 불안처럼 경험되므로, 타인으로부터 증상을 쉽게 공감 받을 수 없다. 또한 현대인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다 겪고 있는 현상이므로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척 심각한 문제이며, 발병하면 치료가 쉽지 않다.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개인의 삶이 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채 목적 없이 표류함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무너진 공동체를 복원하고, 그 속에서 타인들과의 유기적인 연결성을 경험하면 근원적으로 치유가 될 수 있다. (p.357 '마음 들여다보기(작품 해설)' 중에서)

  그래서 영민의 질문에 머뭇거리면서도 솔직하게 감정을 털어놓는 8명이 굉장히 용기 있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타인에게 주저 없이 보여주고 상대방의 공감을 통해 위로받으며 서서히 치료한다. 그 모습에서 뭉클하면서 따뜻함을 받을 수 있었다. '괜찮다'라는 말만 연신 하는, 쉽게 자신의 진짜 감정을 털어놓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뉴런하우스≫를 읽고 나면 내가 그동안 숨겨왔던 감정을 조금씩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다'라는 말 대신에, 나는 지금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고 왜 그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지 후련하게 털어놓고 싶다. 내가 먼저 용기 내서 이야기한다면 타인도 용기 내서 그 이야기를 들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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