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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질문들
김경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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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질문들", 사람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게끔 제목을  잘 지었다는 느낌이 드는 책이다. 특히나 요즘 창의성을 중시여기는 사회 분위기와도 잘 부합되는 제목이 아닌가한다.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책을 보면, 인문서들이 많지 않은데, 그것은 다른 분야에 비해 인문서들이 쉽게 읽히지 않기때문에 결국 사람들의 외면을 받은게 아닐까한다. 그런 의미에서 쉽게 읽히는 대중 인문서들이 많이 출판되었음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이 책은 그런 대중의 욕구에 충실한 책인거 같아 반가웠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세상을 바꾼 질문을 던진 15명의 이름을 훑어보고, 저자가 이들을 선정한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세상을 바꾼"이란 엄청난 말의 무게를 15인이 멋지게 짊어지고 해결하고 있는지, 그리고 저자가 그 일을 글로 잘 풀어냈는지 기대가 됐다. 본문을 읽으면 읽을 수록 저자의 기획의도는 좋았으나, 약간은 비약적이고 무리한 시도는 아니었는지 생각이 들었다. 일단 15인의 선정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거 같아 공감이 되지 않았다. 저자는 "당시에는 아무리 무시당하고 비난받아도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가며 결국 언젠가는 그 가치를 인정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어 왔다(p.113)"는 판단으로 열 다섯명을 꼽은거 같다. 하지만 이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석연치 않은 인물들이 몇 명 생긴다. 현실, 상식, 권위에 순응하지 않고 용기를 내서 도전한다는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그들의 그런 행동이 당대에 혹은 후대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거나 시대정신을 이끌고 삶의 패러다임을 바꿀만 한 것이었나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인거 같았다. 분명 저자만의 선정 기준이 있었을 테지만 글에서는 그러한 점이 잘 드러나지 않아, 이런 불확실한 부분이 독자의 가독성을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현재 눈에 보이는 세계인의 삶의 양식을 바꾼 멀리는 에디슨 가깝게는 스티븐 잡스보다 일론 머스크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미셀 푸코나 에릭 홉스 봄 혹은 프로이드보다 에드워드 사이드였어야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하인리히 슐리만같은 경우에는 트로이 목마에 대한 열정으로 고고학 분야에 불을 지피기는 했지만, 오히려 문화재 훼손이라는 양면이 존재하는 논란의 인물이기에 그러한 면도 선정에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메리 울스턴 같은 경우에도 동시대에 여성 인권과 참정권에 대해 열정적으로 투신한 이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어떤 기준으로 왜 그녀가 이 목록에 올랐는지 설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세상에 던진 그 질문이 현재까지 인류사에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도 그다지 동의가 되지 않았지만, 그보다도 왜 추리소설 분야를 소재로 선택했는지도 설명되어야 한다. 각 인물의 선정 이유, 더 나아가 그 인물들의 전공 분야가 인류사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분명히 밝혀 논란의 여지를 없애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또한 저자가 서양근대사 전공자라 그런 것이겠지만, 너무 서양 중심적이고 근대 이후만 다루며, 동양적 시각이 배제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근대 이후 서양을 중심으로 세계가 재편성되고 급격한 변화를 겪고 그 영향이 전 세계에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양 중심적인 사관에 의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해부학에 근본적인 의심을 품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를 첫 번째 인물로 이 책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저자는 해부학 분야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베살리우스 자체보다, 그가 살았던 시대 즉 르네상스 시대를 주목하고 싶은거 같았다. 르네상스 운동을 기점으로 서양이 세계사의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고 그 시대의 영향을 받은 상징적인 인물로 베살리우스를 내세웠다는 느낌이다. 
 두 번째 인물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로 우리에겐 이미 "군주론"으로 익숙한 사람이다. 아마 "군주론"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입시 공부때문에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마키아벨리 역시 르네상스라는 새 시대의 흐름을 읽고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정치사상을 제시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인물은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던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다. 혁명의 근본에 대해 질문을 던진 로베스피에르를 읽는 중에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고, 그의 질문이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p.70)"는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그리고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있는 지금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당시 프랑스 혁명의 기본 정신을 또박또박 읽어주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났다. 하지만 저자가 로베스피에르를 저술하면서 그에게 연민을 가지게 된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심지어 '공포정치'마저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는 입장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너무 로베스피에르의 편에 서서 기술하지는 않았나 한다.
 네 번째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다. 그녀의 여성 권리 운동은 당시에는 즉각적인 효과를 일으키진 못했지만(p.110), 여성 운동에 마중물같은 역할을 하였기에 선정된 것 같다. 그리고 울스턴크래프트라는 여성 인권 운동가를 만들어낸데에는 역시 당시 계몽주의라는 시대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즉 저자는 세상을 바꾼 영향으로 르네상스, 혁명에 이어 계몽주의를 중요 포인트로 꼽고 있는 것 같았다. 
 다섯 번째는 루트비히 반 베토벤으로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자신의 핸디캡을 뛰어넘은 대단한 사람이지 세상을 바꿀만한 인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섯 번째는 진화론의 찰스 다윈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계에 파장을 일으켰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진화론이 계몽운동이라는 시대 흐름속에 나왔고 후에 산업화와 결합하여 다윈주의, 적자생존, 우생학 등의 이론을 낳았으며, 결국 제국주의에 날개를 달아주었다는 부분은 저자가 왜 찰스 다윈을 선정했는지 충분히 설명되는 부분이었다. 
 일곱 번째는 전설을 현실로 증명한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슐리만은 야만성이라든가 진실성 여부로 아직 논란이 있는 인물이고, 그래서 돈이 아니라 끊임없이 꿈을 좇는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도 조심스럽게 내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아마도 저자는 제국의 시대 부산물로 슐리만을 선정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덟 번째부터 마지막 열 다섯 번째는 이사도라 던컨, 코코 샤넬, 애거사 크리스티, 프란츠 파농, 마거릿 미드, 에드워드 사이드, 크레이그 벤터, 일론 머스크가 선정되었다. 이중 프란츠 파농은 제국주의 종식의 끝에서 활동한 인물로 에드워드 사이드는 냉전 시대의 대표 인물로, 크레이그 벤터와 일론 머스크는 아직 그들의 실적을 평가내리기에는 시기상조지만 인류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인물로 한 명씩 꼽은거 같다. 
 저자는 르네상스, 혁명, 계몽주의, 산업, 제국주의, 냉전시대, 미래를 키워드로 잡고 각 시기에 인물들을 정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경민의 책을 읽다보니 사이토 다카시의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이란 책이 떠올랐다. 사이토의 책에서는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 종교"를 세계를 움직인 힘으로 보고있다. 물론 사이토의 책도 몇 가지 아쉬운 점과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다섯 가지의 주제로 세계사의 움직임을 풀어나가는 면이 꽤 신선했는데, 어떤 면에서 김경민은 사이토의 다섯 가지 주제를 인물 중심으로 설명해내려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매년 일정한 논문 편수로 실적을 내야하는 학계에서는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문서가 나오기 쉽지 않은 풍토인데, 김경민 같은 연구자가 있어 앞으로의 대중 인문서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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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아벨라르.엘로이즈 지음, 정봉구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읽기 전에 이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에겐 상당히 생소한 인물들이라 책을 읽기에 앞서 아벨라르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았는데, 지금 우리에겐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지만 12세기 카톨릭에서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한 유명인사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엘로이즈라는 여성과 불같은 사랑을 하고 이후 그들 사이에 오간 편지가 1000여년이 지난 오늘날 나에게까지 읽혔다는 건 꽤나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세기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닌가 싶었다. 평론가들도 이들의 사랑을 그렇게 평가하기도 했고.  
 그러한 기대감, 세기의 사랑을 나눈 그들의 편지를 엿보려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약간의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는 그들 사이의 애절하고 애닳고 그런 순정만화같은 감정보다는 오히려 자기 변명과 비난, 후회, 회피와 같은 감정들이 더 많이 실려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초반의 편지에서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벨라르에 대해서 적잖이 실망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뭐야, 세기의 사랑이라고 하더니 이런 비겁한 변명으로 점철된 편지 따위가 어떻게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평가 되고 있었던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편지 읽기가 후반에 접어들었을 때, 아벨라르에 대해서 100% 동의는 되지 않았지만 인간으로서의 고뇌, 자기방어, 심신의 피로, 슬픔, 절망 등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그리하여 소설, 영화 속에 현실 외면적인 사랑 꽃노래가 아닌 지극히 현실 앞에서의 사랑을 보여준 것 같다. 그래서 천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이들이 잊혀지지 않고 사람들의 공감을 살 수 있었던 걸까?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먼저 아벨라르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편지를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편지를 띄우고 그렇게 서로 답장을 주고 받게 된다. 초반에는 오랜만에 소식이 닿은 옛 연인들간에 오고갈만한 언어들이 편지의 주요 내용이라면  몇 차례 서신 왕래후에는 육체적 사랑의 감정들이 어느정도 신앙 안에서의 사랑과 격려로 바뀌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려는 모습들이 보인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들의 편지를 '사랑의 편지'와 '교도의 편지'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을유문화사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뒷 부분 '교도의 편지' 전체를 수록하지 않고 일부 발췌하는 형식으로 실어서, 자칫 지루하고 어렵게 읽힐 수도 있는 부분을 비교적 쉽게 지나갈 수 있게 편집하였다. 사실 일반 사람들이 이들의 편지에서 기대하는 것이 당시 카톨릭 사회의 모습이라든가, 교리는 아닐 것이기에 이러한 편집 방식에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들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단순히 연애편지를 접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주 약간이라도 중세 카톨릭 사회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그 둘의 연애사건에 대한 태도랄까 대처방식이 왜 그럴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도를 더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아벨라르가 한 친구에게 보낸 서신을 읽다보면, 그가 참 비겁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11~12세기 타락한 카톨릭 수도사들 사이에서 자신이 생활에서 얼마나 금욕적이고 절제를 했는가를 열심히 설명한다. 그리고 자신의 뛰어난 수사학, 성경 해석으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시기 질투하여 음모에 빠지게 했는지도 열심히 설명한다. 그의 이런 설명이 길어질 수록 오히려 아벨라르가 깊은 절망속에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엘로이즈 본인에게 보낸 것은 아니지만, 이 서신을 읽게 된 엘로이즈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엘로이즈의 첫 번째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그것이 참 궁금하였다. 엘로이즈는 아마도 참 많이 불편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엘로이즈 서신 앞 부분에 " 거의 전부가 나에게 쓰디쓴 과거를 회상케 하여, 내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또한 끊임없는 당신의 불행에 대한 이야기였으니까요."라는 대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당신이 내게 지고 계신 그 의무를 따져 보십시오."라든가 자신에게 정성을 쏟지 않고 오히려 반역의 무리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아벨라르의 행위를 "허송세월"이라고 표현하는 등 강한 발언을 이어나간다. 그러면서 "하여간 나는 나의 위로를 위해서 당신 이외의 그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라며 아벨라르의 관심과 사랑을 촉구하고 있다. 엘로이즈가 수녀가 된 것도 아벨라르의 명령으로 된 것임을 상기시키며 "당신만이 내 마음과 몸의 유일한 주인이심을 보여드렸던 것입니다."라며 아벨라르에 대한 여전한 사랑을 드러냈다. 편지 마지막 부분의 "제발 살펴주세요. 내가 당신께 바라는 바를."이라든가 "나는 이 봉사의 보수를 신에게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도 신에 대한 사랑을 위해선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니까요." 대목에선 사랑의 화신 엘로이즈를 볼 수 있었다. 그러한 발언은 참으로 용감하고도 위험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사랑앞에서 아무것도 따지고 재지 않는 용감하고도 무모한, 강한 발언을 쏟아냈지만 사랑앞에서 약한 여성임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에 비해 두 번째 편지,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에게 쓴 답신을 보면 뭔가 선을 긋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답신은 한마디로 "날 위해 기도해라"는 정도로 밖에 읽히지 않았다. 엘로이즈가 듣고 싶어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한쪽은 다소 감정이 격한 상태로 편지를 써내려갔다면, 다른 한쪽은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느낌이랄까. 상당히 이성적이고 정제된 문체를 유지하려 애쓴 답신이라 생각된다. 
 다시 세 번째 편지인 엘로이즈의 답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편지였다. "나는 하느님을 노하시게 하는 일보다 당신을 노하게 할까 더 근심해 왔습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는 욕망보다도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욕망이 더 컸습니다. 내가 성의를 입은 것은 당신의 명령 때문이었지, 성소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의 문구는 여인 엘로이즈가 아닌 수녀원장으로서는 상당히 부적절하고 위험한 발언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네 번째 아벨라르의 편지에 이르면, 그동안 회피와 변명으로 일관해오던 그의 입장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내가 당신의 마음속을 충분히 살펴 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금 절박한 위험 속에서 계속되는 삶의 위험으로 상시 절망에 빠져 있는 내 입장을 생각해 주시오."라는 대목에서 아벨라르의 답답함, 위기감, 절망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사랑 꽃노래가 아닌, 육체적인 사랑을 넘어서 신앙안에서 하나가 되자고 유도하고 있다. 엘로이즈가 육욕에서 벗어나 이제는 예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느낌의 편지였다. 진정한 구원,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설교같기도 하고 신앙고백같기도 한 편지다. 사실 이미 남근을 잘린 아벨라르의 입장에서, 게다가 신앙적으로 공격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엘로이즈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초반엔 뻔뻔해 보이던 아벨라르의 나름의 고충이 읽혀졌다. 아무리 뛰어난 당대의 석학이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그도 인간이기에 연약하고 언제라도 유혹에 쉽사리 넘어갈 수 있는 존재임을, 그도 정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끊임없는 자아 투쟁해야 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오히려 위안이 되기도 하지않을까 한다. 사랑의 편지 파트의 감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엘로이즈는 거침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아벨라르는 그 감정들을 믿음, 신앙으로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자는 느낌이었다. 
 교도의 편지는 오늘의 카톨릭 상식에 비추어봐도 크게 벗어나거나 특이한 점은 없어 보인다. 다만 아벨라르는 유독 여성과 남성의 다름을 언급하며 각자 지켜야 할 규칙과 역할도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당시 수도사와 수녀들이 같은 수도원에 머물면서 수녀원장이 수도사를 관할하는 일이 있었는데, 아벨라는 그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의 이런 입장은 엘로이즈에게 그들의 문제를 신앙으로  극복하라는 권유에서도 역시 남여의 적용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듯했다. 엘로이즈의 교도의 편지 부분에서 '당신의 요구가 나에게 과하다'고 읽히기도 했다. 
 이들의 편지를 읽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편지를 읽고 답신을 쓰면서 어떤 생각, 감정을 가졌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그러면서 타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결국은 타인의 성생활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부합하여 이들의 이야기가 10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고 알려져 온건 아닌가 싶다. 다르게 말하면 이 둘은 지금까지도 본인들의 욕망의 벌을 아직도 받고 있는건 아닌가 한다. 내 사생활이 천 년 후에도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그리 유쾌하지 않을거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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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믿는 만큼 크는 아이 - 용기 있는 아이로 키우는 아들러 육아
기시미 이치로 지음, 오시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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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서를 읽는 목적은 무엇일까? 양육 방법을 몰라서? 아이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니면 아이를 잘 키우는데 중요한 팁을 얻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부모와 아이의 좋은 관계 형성을 위해서일까?
물론 이런 여러 목적으로 부모들은 오늘도 다수의 육아서를 들추고 있을 것이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은 여느 부모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를 잘 키운다란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 기시미 이치로의 "엄마가 믿는 만큼 크는 아이"가 그 열쇠를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기시미 이치로의 이 책은 그저 단순히 어떤 상황에서 아이에게 어떠한 행동을 취하라, 이런 언어를 사용하라라는 기술을 적고 있지 않다. 그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잘 융합되는 한 인간'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육아에서 지향해야 할 목표라고 말하고 있다.(p.159) 즉 공동체 감각의 육성이다.
기시미 이치로가 말하는 그런 육아를 하기 위해서 부모는 어떤 거창한 걸 준비할 필요가 없다. 그저 아이를 조종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야단치지도 않지만 칭찬하지도 않는,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논리를 피고 있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만 해도 아이가 바르게 자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정말 이것만 하면 되는 것인가 하는. 그리고 이걸 누가 몰라서 못하나하는 마음도 든다.
작가는 심리학자 아들러의 이론을 육아에 접목시키고 있지만, 결코 탁상공론적인 주장은 아닌 것이 그가 직접 자신의 아이를 양육하며 겪은 실제 사례가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믿는 만큼 크는 아이"에서 가장 공감하며 읽은 부분은 '인간관계 속에서 생각하자'였다.(P.39) 솔직히 육아를 하다보면 아이의 언행에 부모인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모를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야단을 쳐보기도 하고, 그 방법이 영 신통치 않으면 작전을 바꿔 칭찬을 해보기도 하다가, 그것도 안먹히면 무관심 전략을 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간과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저자가 말하는 '인간관계'였다. 물론 의식 속에는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기에 존중해주자는 것이 있었지만, 실제 상황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질 때가 훨씬 많았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이를 존중하는 것(P.195)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가정은 하나의 '소사회'이고, 그 구성원인 부모와 아이는 서로 협력해야하는 관계로 무조건 신뢰해야함을 잊지 않는다면, 이것만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아이는 훗날 더 큰 사회로 나가더라도 훌륭하게 공동체 안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저자 기시미가 말하는 교육과 양육의 최종 목표로 즉 아이의 '자립'을 도와주는 것이다(P.214)
이 책은 육아서의 '전과'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챕터마다 마지막에 요점 정리 박스를 만들어놨고, 본문에서도 중요 포인트는 드래그로 표시해놨기 때문에 좀 더 수월하게 읽히는 면이 있다. 육아로 집안 일로 혹은 직장 일까지 병행해야하는 부모들이 단시간에 중요 포인트를 짚으면서 읽을 수 있게 배려한 느낌이다. 하지만 쉽게 읽히지만, 결코 (내가 실천하는데 있어) 쉽지만은 않은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곁에 두고 육아로 내 자신이 무너질 때 틈틈이 뒤적여봐야 할 책같기도 하다.
육아서라지만 읽으면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또한 나의 성장기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밑거름 삼아 나의 아이를 어떻게 양육해야하는지 고민하게 되는 기회였다. 나는 내 아이가 마음이 단단하고 튼튼한 사람이 되길 바라고 있는데, 이 역시 우리의 '관계'가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임을 다시 한번 인지하고 넘어가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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