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영국인, 베델 다문화 인물시리즈 9
한유섭 지음, 허새롬 그림 / 작가와비평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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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인물시리즈 10.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영국인, 베델

 

 

 

  

 

 

지은이 : 한유섭

그린이 : 허새롬

펴낸곳 : 작가와비평

발행일 : 2020년 8월 30일 1판1쇄

도서가 : 12,000원

 

 

 

  

 

 

다문화 인물시리즈 아홉번째는 베델입니다. 베델은 일제 강점기 시대에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여 독립운동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죠. 1872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난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hell)은 16세에 부모를 따라 일본 고베로 이주하면서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합니다. 외향적인 성격인 베델은 32세가 되던 1904년에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 제의를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하게 됩니다만 특파원을 곧 그만두고 같은해 영문판 4면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와 한글판 2면인 '대한매일신보'이 합쳐진 신문을 창간합니다. 이듬해에는 두개의 언어 지면을 국한문판 신문과 영문판 신문으로 분리하여 두개의 신문을 각각 발행하였다 하구요.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강탈'과 '시일야방성대곡', '고종의 밀서 사진' 등 일제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와 논설을 신문에 실어 일제를 곤혹스럽게 하였답니다. 당시 일본은 영일동맹을 체결한 상황이었기에 영국인이 사장으로 있는 '대한매일신보'를 다른 조선인들이 운영하는 신문들처럼 탄압하기가 어려워 대신 영국측에 베델을 처벌해달라 요구하였고, 영국측에서도 더이상 버티기 어렵게 되자 베델을 재판에 회부하였으며 베델은 재판 결과 6개월 근신형 판결을 받았답니다. 베델은 근신기간 동안 신중한 논조로 신문을 발행하다가 근신기간이 만료되자마자 다시 격렬하게 일제 통감부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에 일제는 베델을 추방시키기 위한 공작을 적극 추진하여 1908년 두번째 재판이 열리게 됩니다. 재판 결과 3주일 금고형과 복역후 6개월간 근신 서약을 하라고 판결납니다.  

 

 

  

 

 

하지만 베델은 1909년 5월 1일 37살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게 됩니다. 사인은 심장병(심근비대증)이었다는데 재판과 상하이에서의 금고형 양기탁 재판 때 국채보상의연금 문제로 조사받은 일등으로 건강을 크게 해친 것이 주 원인이라 하네요. 시신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정되었고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 비문을 작성하였는데 일제는 묘비의 비문을 깎아내버리는 만행을 저질르죠. 현재는 1964년 전국 언론인들의 성금을 모아 깎인 비문을 복원한 작은 비석이 원 비석과 함께 세워져 있답니다.  

 

 

 

 

 

베델이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남긴 유언은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이었답니다. 그가 죽는 순간까지도 위기에 빠진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한 마음을 잘 보여주는 말이죠, 이와 같은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는 베델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했답니다. 베델 사후에는 베델의 비서 영국인 알프레드 만함이 사장직을 이어받아 대한매일신보는 유지되었지만 영국과 일본의 공작에 의해 신문사는 700파운드에 일본에게 팔리게 되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대한' 제호를 떼어낸 '매일신보'로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됩니다. 해방후에는 서울신문으로 이어졌다고 하구요.


20세기 초반 일제의 침략정책을 비판하던 '대한매일신보'를 운영한 영국 언론인 베델. 아무런 연고도 없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해 그렇게 헌신하였다는게 보통 사람의 시각으론 의아스럽기까지 합니다. 그가 걸어온 과정들을 살펴보면 조선에 대해 엄청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네요. 그의 급작스런 죽음니 의문스럽긴 하지만 그의 조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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