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조국 - 우장춘 박사 일대기
츠노다 후사코 지음, 우규일 옮김 / 북스타(Bookstar)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도서후기] '우장춘 박사 일대기 ; 나의 조국'

-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 길가에 민들레는 밟혀도 꽃을 피운다 -

 

 

 

  

 

저자 : 츠노다 후사코(角田房子)

역자 : 우규일

펴낸곳 : 북스타

발행일 : 2019년 6월 28일 초판1쇄

도서가 : 20,000원

 

 

점점 무더워지는 요즘 시원한 것들 무척 생각나게 하는 더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름철 시원한 것으로는 빙수만 한게 없겠지만 수박화채도 참 좋죠. 빨간 속과 함께 검은 수박씨와 얼음이 동동 떠있는 수박화재. 생각만 해도 시원함이 절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수박화채에 씨가 없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편하게 먹을 수 있겠죠?ㅎㅎ 씨없는 수박하면 떠오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우장춘 박사죠. 이 분은 70~80년대 출간된 아동용 위인전집이라면 거의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매우 추앙받는 분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만 요즘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세대들을 보면 이 분이 누군지 아는 아이 그리 많지 않은거 같더군요..

 

이번 도서후기는 그러한 우장춘에 대해 일본인 여성이 저술한 <우장춘 박사 일대기 ; 나의 조국>입니다. '나의 조국'이란 말에 책내용 방향이 어떠한지 살짝 짐작됐지만 일본인의 시각에서 어떻게 표현했을런지가 궁금했지요. 읽어보니 재일 조선인 차별에 대해 냉혹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쓰였더란 느낌이 들던데 그 느낌, 참 오래가더랍니다.. 그리고 일본에는 제국주의를 꿈꾸는 소위 극우파라 불리는 인간들만 있는게 아니다란 걸 알게도 해주었구요.

 

저자는 1914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2010년 사망한 여성분으로 당시로는 보기 드문 프랑스 소르본대학에 진학하신 분입니다.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는데요. 종전 후에 남편의 전근으로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많은 군인들의 전기를 저술하였다는군요. 저자의 작품 중 눈에 띠는 건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을 소재로 한 논픽션이 있다는 것인데요. '명성황후 ; 최후의 새벽(원제 : 閔妃暗殺)'이란 책으로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된 책이라 합니다. 우장춘 박사 일대기를 읽어 보니 수많은 인터뷰와 남아 있는 기록들을 고증하여 당시 상황을 추정한 내용들이 많던데 이 책도 그러할 것 같아 보이네요. 기회되면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책은 <한국 독자들을 위한 저자 서문>으로 시작하여 <프롤로그>, <1. 나라 잃은 국민의 슬픔>, <2. 한국 농업의 선구자>, <프롤로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문부는 우박사의 일본에서 삶과 한국으로 귀국한 이후의 삶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연대순으로 집필되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재일한국인의 고단함과 슬픔을 일본인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표현한 내용이 좀 낯설게 느껴졌어요.

 

책은 <한국 독자들을 위한 저자 서문>으로 시작됩니다. 저자는 당시 일본에 살고 있는 우장춘 박사의 다섯 자녀와 손자들, 학계 후배와 지인들,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 제자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농학자들을 만나 우박사에 대한 회고담을 전해 들었다고 하면서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이 우박사가 아니란 점을 책 본문에 상세히 밝혔다고 합니다. 최초로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이는 일본 교토대의 기하라 히토시로 1943년에 처음 만들어졌다네요. 하지만 기하라 히토시도 우박사의 '종의 합성'의 이론을 바탕으로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고 했답니다.

 

흥미로운 내용으로 저자는 우장춘 박사에 대한 전설이라며 '민들레의 교훈'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책의 여러군데에서 파편처럼 흩어져 수록된 내용인데요. 소년 시절 우장춘이 차별과 학대를 받고 길거리에서 울고 있을 때 모친이 민들레꽃을 가리키며 한 말로 우장춘의 제자인 홍영표의 수필에도 수록된 내용이랍니다. 내용은 "민들레는 아무리 짓밟혀도 끝내는 꽃을 피운다. 네게 괴로운 일이 많겠지만 거기에 굴하지 말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며 용기를 북돋워줬다는게 그것이죠. 저자가 우범선의 차남이자 우박사의 동생으로부터 확인한 바로는 모친은 공부해라, 훌륭한 인물이 되라, 또는 아버지에 관해서, 조선을 위해 봉사하란 그런 말씀 전혀 하신 적이 없었기에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답니다. 의지가 강하신 분이었지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법이 없었던 분이었다는 것이죠하지만 제자였던 홍영표의 기억에는 우박사께서 연구생들에게 격려와 충고를 하면서 직접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장춘의 모친은 두 아들에게 다른 교육방침으로 키운게 아닌가 추측하더군요. 조선의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생전의 아버지를 기억하는 장남은 아버지의 나라에 헌신하는 인간이 되도록, 아버지가 작고한 뒤 태어나 호적상 순수한 일본인인 차남은 장치 일본 사회에서 훌륭하게 살아가도록 말이죠.. 그럴 수도 있을까 싶었습니다.

 

우장춘 박사는 1935년 발표한 '종의 합성'이란 논문을 통해 세계 최초로 자연종을 합성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 수 있다는걸 증명해 낸 세계적인 유전육종학자로 명성을 얻었던 분입니다. 1950년 한국에 귀국해서는 식량 증산을 위해 종자 개발 등 많은 기여를 했었죠. 우 박사의 부친은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들과 함께 왕궁에 들어가 민비 시해의 공범자라 알려진 훈련대장 우범선입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일본으로 가 동경에서 거주하다가 사카이 나카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우장춘은 1898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나 1950년 한국으로 올 때까지 일본에서 오십여년을 살았습니다. 우장춘이 한국에 건너갈 때 쯤 결혼한 차녀 마사코 기억에는 아버지가 일본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게 되었고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는군요. 그러면서도 '차별은 있었다'라고도 말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는데, 저자는 우장춘이 근무하던 연구소에서 승진에 차별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내면에는 많은 고뇌가 있었을거라 유추가 되지요.

 

우박사는 구레중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 농학부 농학실과에 입학, 1919년 졸업했답니다. 그런데 농학실과는 농학부 내에 있지만 졸업 후에도 농학부에 진학할 자격을 부여받지 못하는 전문학교라는데요. 그렇지만 박사 논문을 동경제국대학 농학부에서 취득하였기에 우장춘 박사의 학력을 표시하는데 사실과 다른 경우가 흔하답니다.

 

 

  

 

우장춘 박사 역시 1924년 일본인 여성 고하루를 아내로 맞이하여 2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답니다. 사범학교에서 수재였다 전해지는 고하루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는데요.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고 남편이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정일 신경쓰지 않게 잘 내조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있을 때 현지처 같은 분이 있었답니다. 일본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이혼 경력 있는 여성이었다는데 우박사 사후에도 우박사 묘지가 있는 수원에 사셨다는군요. 흐흠.. 큰일을 이루신 분이 여복도 많았네요.

우장춘과 고하루가 결혼에 이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답니다. 고하루의 집안에서는 극렬하게 결혼을 반대하였다는데요. 이로 인해 고하루는 시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생가와 29년이나 의절했다네요. 혼인신고를 하는데 있어서도 복잡하기 그지 없었답니다. 호적등본을 보면 고하루가 스나가 고헤이 부부의 양녀로 들어간 뒤에 우장춘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답니다.

 

해방 이후 한국에는 식량부족이 극심해집니다. 일제의 식민지 강탈로 종자는 물론 비료, 농약도 없어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을 정도였다네요. 이러한 농촌의 사정으로 인해 육종학자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귀국 추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50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게 되었답니다. 일가족을 일본에 남겨두고 홀로 귀국하였는데 그것은 막내의 교육문제와 딸(마사코)의 결혼문제가 있었을거라고 저자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귀국후 우박사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에 취임했는데 한국어를 잘 몰랐기에 일본어로만 소통했었고 죽을 때까지 일본어만 사용했답니다. 한국농업과학연구소에 취임한 우장춘 박사는 국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무와 배추의 종자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그로부터 석달 보름뒤 6·25전쟁이 발발했다네요..

 

 

  

 

부산에 위치한 연구소이지만 피난민 유입으로 인한 인구 급증과 주거 식량 부족 사태 등으로 혼란상태였다는데도 소장으로서 당황하는 모습 전혀 보이지 않고 연일 작업복 차림으로 직원들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우량한 채소 종자 생산에 힘쓰던 우박사는 무엇보다 자급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데요. 전쟁의 영향으로 연구가 지연될 것을 우려해 연구 사업계획을 주도적으로 명확하게 제시하고 실천하게 했다는군요. 이외에도 채소 원종의 생산과 종자의 대량 생산 적임지를 찾아 제주도를 방문한 우장춘 박사는 제주도 기후가 귤 재배에 적합하다 판단하여 품질 좋은 묘목을 도입하고 재배기술을 지도하여 국내 최대의 귤생산지가 되도록 기여했답니다.

 

우장춘박사는 귀국한지 9년 만인 1959년에 위와 십이지장 궤양으로 3차에 걸쳐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1959년 8월 10일 오전 3시 10분에 숨을 거둡니다. 아내 고하루는 우박사가 숨을 거두기 보름전에 일본에서 들어와 남편의 임종을 지켰다 합니다. 비록 심혈을 기울였던 품종 개량하던 벼(일식이수)의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제자들이 꽤 자란 상태의 '일식이수'를 공수해 와 보여주기까지 했다는군요.

 

에필로그의 첫문장도 인상적이었는데요.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가 그것인데 이 말은 우장춘 박사가 숨을 거두기 3일 전에 병상에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떨리는 손으로 수여 받으면서 눈물 흘리며 한 말이라고 합니다. 음... 헬조선이라며 기회만 된다면 이민가겠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 순간 우장춘 박사의 심경이 어떠한 건지 상상이 잘 되질 않네요.. 짧은 제 소견으론 이 말은 우박사에게 있어서 일본인으로 살아온 삶보다는 한국인으로 살다간 삶이 더 중요했다란 의미인 듯 보이는데요. 보이지 않은 차별로 일관한 일본보다는 자신을 우대하고 환영해 준 한국을 조국으로 여겼다는 말일테니까요.

 

 

  

일본인이 집필한 우장춘 박사의 일대기이지만 의외다 싶을 정도로 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쓴 부분이 무척 많습니다. 저자는 어쩔수 없는 일본인이구나란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극히 드물구요. 돌려서 말하거나 제3자의 발언처럼 쓴 문체가 많다는게 특이하게 보였습니다만 확실히 객관적이게 보여줍니다. 재미도 있구요. 우장춘 박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이라면 이 책만큼 그에 대해 많은 걸 알려주는 책은 흔치 않을 것 같아 보이기에 한번 읽어 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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