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른 곳을 사유하자 - 정주하지 않는 지식인의 삶과 사유
니콜 라피에르 지음, 이세진 옮김 / 푸른숲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다른 곳을 사유하자>
‘다른 곳에 대해 두루 생각해보자.’는 제목의 이 책은 나에게는 생경한 분야의 책이다. 손가락 한마디 반 정도의 두께인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지식인들 중에 내가 아는 이름은 한나 아렌트, 이 하나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에 대해서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고 그런 이름의 유명한 여자가 있다는 사실밖에는 몰랐다. 그리고 비로소 지금에서야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 그녀는 유대인이며 지식인이다.
이 책에는 한나 아렌트를 비롯해, 스테판 츠바이크, 카를 만하임 등의 생소한 이름의 지식인들이 쉴 사이 없이 등장한다. 등장인물만 훑어봐도 알겠지만, 제목과 표지에서 풍기는 오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심심풀이로 또는 킬링타임 용으로는 절대로 권장할 만한 책은 아니다. 묵직하면서도 진중한 분위기가 책 전반에 흐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책장 한 장을 넘기는데 천근만근의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지루한 책만도 아니다. 이 책은 뭐랄까... 애매하다고 해야 할 듯하다. 아주 확실히 재미가 넘쳐흐르는 위트가 충만한 책은 아니지만, 눈꺼풀에 중력을 작용시키는 책 또한 아니다. 이 책이 다루는 여러 지식인들의 고심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어느 한 곳에 정주해 있지 않고 세상을 부평초처럼 떠다니며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적 상황,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고민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살아남기 위해 조국을 떠나 유럽대륙과 미국으로 모여들었다. 날마다 바뀌는 국제정세와 그에 따라서 변하는 사람들과 사회. 그렇게 격동이 심한 시대 속에서 지식인들은 자신의 처지와 정체성, 그리고 사회전반을 둘러싸고 있는 무형의 의식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으며, 자신이 옮겨간 이질적인 공간을 외부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낸 결실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고, 우리는 그들의 결과를 통해 그들을 조금이나마 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은 사람에게 예상치도 못한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들은 그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고뇌했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서로 다른 두 집단에서 오는 괴리감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제 이 연구의 대상은 비단 타의에 의해 조국을 잃고 떠도는 망명자들뿐만 아니라 자의로 다른 문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까지 아우르며, 세계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서로 다른 문화 간의 교류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 -충돌과 퓨전문화, 그리고 혼혈-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비록 그 시작에는 쫓겨나 떠돌아다니는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현대판 방랑자들을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과 생각은 비단 지리적, 문화적인 경계를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종교와 학문의 경계까지 무너뜨리며 생각과 체험의 폭을 넓히고, 자신의 정체성에 국제성을 더해나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지금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며, 또 이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