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확 불붙었다가 따뜻함을 느끼려 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성냥불꽃 같다고 할까? 긴 호흡으로 꾸준히 들려주는 장편이 나의 취향이다. 그런데 은희경의 이번 작품은 워낙 많은 칭찬을 하는 작품이라 읽어보리라 마음 먹었다.
눈이라곤 볼 수 없는 부산에 사는 나는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라는 제목만 들어도 설레였다. 어린 시절 눈의 결정을 발견하고는 세상의 모든 신비를 알게 된 것 같은 즐거움이 문득 떠 올랐기때문이다.
이 소설집은 6개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따뜻한 남해에서 추운 서울로 올라와 학원을 다니는 안나의 첫사랑 이야기가 오밀 조밀 펼쳐지는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이 소설의 제목이 되는 소설, 결혼하여 신도시에 정착하며 살게되는 새색시의 흔들리는 삶을 이야기하는 "프랑스어 초급과정", 미국에 어린 나이에 유학하여 살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살게 되는 젊은 청년의 헛헛한 이야기 "스페인 도둑", 엄마와 달랑 둘이서 미국에서 갑자기 살게 된 아이의 눈으로 그려지는 "T ,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자꾸만 실수하고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자신감 없는 여자의 삶을 그린 "독일 아이들만 아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금성녀". 이때까지 단편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시간적 배경이 겹치고 연결되는 이상한 느낌이 "금성녀"에서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말만 소설집이지, 금성녀에 이르러서는 이건 완벽한 한편의 장편이라고 고함 지를뻔 했다.
섬세하게 한 명 한 명 그려낸 인물들이 시대와 사건에 얽혀 마무리 되는 것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그냥"이라는 것이 없음을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 한 명은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 우리를 힘겹게 하지만 어쩌면 우리를 삶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는 것도 냉소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집을 읽으며 다시 깨닫는다.
금성녀를 읽고 나의 손은 다시 맨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고 나의 눈은 또 다시 은희경이 이끄는 차가운 삶의 가운데로 끌려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은희경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쳇바퀴만 열심히 돌리며 허우적거릴 것이다.
그래도 기쁘다. 또 한 명의 멋진 작가의 이름을 내 수첩에 적을 수 있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