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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인간의 도리를 말하다 ㅣ 푸르메 어록
김영두 엮음 / 푸르메 / 2011년 1월
평점 :
고3, 대입공부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 제일 싫었던 공부가 윤리였다.
윤리 선생님은 할머니 선생님이셨는데, 윤리, 철학등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셔도 쏟아지는 잠때문에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외워도 외워도 잘 외워지지 않는 내용들 때문에 괴로웠다. 수많은 외국인 철학자들뿐 아니라 주리론, 주기론이니 하면서 이황, 이이를 외워야 했던 시절이 지금 생각해도 소름끼칠 정도이다.
철학이라고는 실제 생활에서 배운 적도 없고 고민한 적도 없는데,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들로 시험을 쳐야 한다니 외우기는 해야겠고, 피부에 와 닿지는 않고, 퍽이나 곤란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리 철학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해도 고리타분한냄새가 날 것 같은 "이황", "이이"의 세계는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우겼던 젊은 날의 치기를 비웃듯 지금 나는 이황 선생님께서 일러주시는 인간의 도리를 들어보고자 책을 펼치고 있다.
퇴계 선생님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한다. 요즘 말로는 한부모 가정이었는데 아버지의 자리를 숙부님께서 매김해 주셨다고 한다. 대가족의 위력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퇴계의 인생에 있어 숙부의 자리 매김이 없었더라면 우리 후손들은 그의 존재를 까마득히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로서 정을 베풀어주기도 하고 학문의 길라잡이도 되어주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신 듯하다.
이 책에는 퇴계어록이라는 퇴계의 제자들이 남긴 언행록을 모아 만든 책을 한문 원문과 더불어 한글로 번역하여 본문으로 실었다. 한문 까막눈인 나는 한글을 보면서 한문을 역으로 알아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퇴계 스스로 책을 쓰지 않아도 선생의 말씀과 행동을 몸소 배운 제자들이 스승을 기억하며 책을 썼다고 하니 그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감동을 준 스승인지 상상할 수 있다. 감동을 주고 받는 사제관계를 본지도 참 오래다.
나 스스로도 가르치는 길을 가고 있지만 나의 죽음 끝에 제자들이 나의 언행에 대해 글을 써 줄까를 생각해보면 새삼 얼굴이 달아오른다. 제대로 살지도 않으면 언감생심 바랄 수도 없는 욕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퇴계 삶의 중요한 키워드 20개, 이기, 지양, 독서, 봉선, 출처, 상론, 수행, 심법, 법언, 자봉, 추원, 종형, 행장, 사수, 접인, 교인, 벽이단, 숭선정, 향당, 별혐을 꼭지로 하여 퇴계의 말씀을 실어놓았다.
한자 옆에 한글로 풀이를 해주지 않았다면 단어 자체가 뜻하는 바도 잘 모를 법한 어려운 한자의 나열인데, 내용 풀이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독서를 예를 들어 보자면
" 반드시 성현의 말씀과 행동을 마음으로 익히되 푹 잠겨 참뜻을 구하고 묵묵히 깊은 맛을 본 다음에야 바야흐로 심성이 길러지고 학문이 이룩되는 성과가 있게 된다. 만약 설렁설렁 해석하고 넘어가고 벙벙하게 외워 말할 따름이라면 말 몇 마디 귀로 듣고 입으로 옮기는 쓸데없는 재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천 편의 글을 다 외우고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경전을 떠들어댄들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p37)
천박한 글읽기를 경계하는 말씀이다. 진정으로 깨닫고 행동으로 옮겨 참뜻을 구해야 진정한 독서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과거를 위한 글읽기도 경계하셨는데, 오늘날 전공을 학문으로 다가기보다 취직을 위한 다른 공부에 매진중인 우리 청년들의 삶을 생각하면 다시금 와 닿는 글이라 할 수 있다.
퇴계가 굉장히 유연한 학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은 봉선(奉先), 즉 예법의 원칙과 적용이다.
주자 가례로 성리학의 예법을 받들었지만 그가 발붙이고 살았던 16세기의 현실을 무시하지 않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절충하는 현명한 해답을 주기도 했다. 아들이 없는 집에 양자로 입양되는 경우, 양부모 공경을 제대로 하지 않는 현실을 한탄하기도 하고, 부녀자의 초상 때 사내종을 제사 돕는 종으로 삼는 것이 어떠냐는 질문에 "여묘살이에 계집종을 두면 좋겠지만 이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으니, 자식들을 집사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현실적인 충고를 해 주기도 한다.
퇴계의 덕성과 학문 완성도때문에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벼슬길에 오를 기회도 많았는데 이때문에 스스로 고민을 많이 한 듯 하다. 벼슬을 버리자니 임금에 대한 도리가 아닌 듯 하고, 학문을 버리자니 안타까운 상황으로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도리도 몸소 실천하였다.
우리는 퇴계 선생을 주자학의 조선 일인자라고 평가를 하는데, 이는 그저 얻어진 명예가 아니다.
선생의 집에는 주자 문집 사본 한 벌이 있는데, 얼마나 그 책을 많이 읽었든지 책장이 낡아 글자의 획이 거의 깎여 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학문이 완성되지 않으면 덕성이 갖추어진들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이러한 노력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전기때까지만 해도 여자도 재산을 상속 받았는데 선생의 부인도 상당한 재력가의 딸이어서 많은 재산을 물려 받았지만 항상 빈곤하게 살기를 원했고, 스스로 거친 음식이 입에 맞다며 기름진 음식을 삼가하셨다고 한다.
퇴계의 행동은 항상 제자들의 모범이 되었는데 나에게 가장 큰 가르침이 되었던 것은 "자들에게 이름 놔두고 너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맞이하고 배웅할 때면 반드시 댓돌 아래까지 내려가 겸손한 몸가짐으로 예를 다하였으며 자리를 잡고 앉으면 반드시 먼저 어른이 평안하신지를 물었다"(p238)이라는 구절이었다.
나보다 어린, 게다가 학문의 깊이까지 얕은 제자들에게 항상 예를 다하고 정성을 다하셨기에 제자들의 감동을 이끌어 냈던 것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은 여느 일대기나 전기문, 평전과는 달리 선생의 말씀을 중심으로 풀이를 해 준 책이라 퇴계 선생의 귀한 말씀이 쓰여진 배경은 자세히 나와있지 않다. 하지만 자세한 주석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며, 눈 앞의 이익과 권리, 명예에 눈이 어두워 잘 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을 우리들에게 언제든지 바른 길로 걸어가라고 채찍질 해주는 큰 가르침이 실려 있다.
얇은 책이지만 내게 주는 교훈은 엄청난 '커다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