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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천 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
오윤희 지음 / 불광출판사 / 2011년 1월
평점 :
합천에 있는 해인사에 몇 번 간 적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일부러 갔었는데,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인 국보 팔만대장경판이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에 가도 대장경판을 직접 볼 수는 없고, 장경판고의 문살 사이로 겨우 실루엣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세계가 인증한 우리나라 문화재라고 아이에게 설명하며 고려시대 유물이 오늘날까지 건재할 수 있는 기적은 여러 사람의 노력 덕분이었다고 살을 붙여 주었다. 그 중에서도 김영환 대령의 높은 문화인식 수준을 얘기 해 주며 그분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인민군 토벌이라는 이유로 공중 폭격당해 지금 우리가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얘기 해 주었다. 알아야 한다고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아이가 "팔만 대장경에는 무슨 내용이 새겨져 있는거야?"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 말씀이겠지"라고 얼렁뚱땅 말해버리고 나니 나의 무지가 아프게 와 닿았다. 무슨 내용인지 한 번 알아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1993년부터 고려대장경 전산화를 위해 고려대장경연구소 설립에 참여하고 20여년 연구해 오신 오윤희라는 분께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이 책 "대장경, 천년의 지혜를 담는 그릇"을 내 놓으셨다. 천년. 어마어마한 세월이잖는가? 그 세월동안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있어준 대장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책을 펼쳤다.
책은 대장경에서 장(藏) 이야기로 시작한다. 나는 藏이라는 한자를 감출 장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릇이라는 의미로서 설명을 해 줬다. 대장경은 금구옥설, '금으로된 입에서 나오는 옥 같은 말씀' 즉 부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이라 해석한다. 말씀이라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지만, 그 말씀을 담는 그릇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문자가 생기기 전의 선사시대에는 아난이라는 부처님의 제자에게 말씀을 담아 두셨고, 부처님이 열반하자 아난에게 담겨져있던 말씀은 가섭과 오백성중에게 옮겨지면서 집단의 그릇에 담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사람과 사람 관계 사이에 문자라는 외부의 그릇이 생겨나면서 소리를 통해, 귀를 통해 직접 소통하는 일과 글자의 매개를 통해 빛과 눈으로 소통하는질에는 질적인 차이가 생겨나게되었다. 게다가 목판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부처님 말씀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파격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도 부처님 말씀을 담을 그릇을 만들어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다.
서기 1011년 고려 현종 2년 대장경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대장경을 천년의 대장경이라고 하는데, 이때 처음 새긴 대장경을 초조대장경이라 부르고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을 재조대장경이라 부른다. 그리고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만들어진 교장, 이 세가지를 모두 묶어 고려대장경이라 칭한다. 이러한 고려대장경이란 그릇에는 부처님의 말씀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도와 서역에서 저술한 문헌도 포함되어 있고, 그리스 철학과 불교 철학 사이의 토론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힘을 빌어 외세의 침범을 이겨내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고 알고 있는 좁은 나의 지식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한 자 한 자 새길때마다 세 번의 절을 하고 새겼으며, 오탈자가 없고, 한 사람이 새긴 듯 똑같은 글씨체라는 대장경에 대한 자랑이 잘 못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조대장경은 송나라 개보대장경을 엎어놓고 새겼으며,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엎어놓고 새겼으니 글씨체를 자랑할 것 같으면 중국 대장경을 자랑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고려 대장경의 제대로 된 자랑이라고 한다면 중국 대장경보다는 정교하게 교정을 보아서 오탈자가 적다는 점이고, 대각국사 의천과 고려인들이 직접 수집한 장서들의 내용을 담은 교장의 편찬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들은 일본 학자들이 이름 붙인대로 속장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의천은 부처님의 말씀인 삼장에다가 고려인이 직접 모은 오천권 규모의 장소, 주석서를 모아 목판에 새겼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불교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에 이르자 일본에서 달라고 조르면 버리듯이 대장경 인쇄본을 넘겨버렸고, 일본은 이 인쇄본을 소중하게 보존하고 연구해 왔다. 대장경에 대한 연구는 일본의 연구에 기초한다고 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대구 부인사에 있다가 불타버린 초조대장경의 인쇄본이 일본 남경사에서 대량으로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팔만대장경과 비교 연구가 가능했다고 한다. 이미 사라져버린 대각국사 의천의 교장은 없어졌다고 해서 무관심하게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고려인들의 정신이 숨어 있는 교장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야 이 소중한 문화에 대한 무형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이다.
사람에게서 목판으로, 목판에서 금속활자로, 금속활자에서 디지털로 금구옥설의 그릇이 바뀌는 순간이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나처럼 고려대장경에 대해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고, 잘 못된 자만으로 민족성만을 고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계화된 문화속에 대한 민국의 문화를 제대로 심기 위해선 우리가 좀 더 많이 알고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결과를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가르치는 작업이 필요하다.
20년 넘는 긴 세월을 고려 대장경을 위해 애쓰신 오윤희 선생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솔직히 책은 진정 어려웠다. 불교에 문외한인 내가 불광출판사 책을 선택해서 읽은 것이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읽다가 다시 돌아가서 읽고, 또 다시 돌아가서 읽기를 몇 번씩 반복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끝까지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읽으니 전보다 이해되는 부분이 늘어났다.
한 분의 오랫 연구 결과를 공짜로 먹으려는 심보가 나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도 오윤희 선생님의 말씀을 연구하듯이 곱씹어 읽으면 대장경이라는 바다에서 흘러다닐 글자들의 여정을 조금이라도 깨우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오늘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책은 재미로 읽을 때도 좋지만 뭔가 알기 위해 읽을 때가 더욱 신난다는 점이다.
이 책 "대장경, 천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은 정말 신나는 경험을 제공해주는 멋진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