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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 설날을 맞이하여 머리 파마를 해야 하는데 그 지루한 시간을 이길 수 있는 책이 뭐 있을까? 하고 책꽂이를 살피다가 동생이 빌려준 이 책에 시선이 멈췄다.
시라는 문학 장르와 별로 친하지 않는 나도 그녀의 작품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를 알고 있으니, 그녀가 얼마나 유명한 시인인지 알 수 있다. 시는 유명하되 시인 최영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녀에 대해 갑자기 궁금해다. 나의 긴 파마시간을 위로해 줄 책으로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가 뽑혔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만큼 스릴 있는 일은 없다.
'일부러 훔쳐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로 시작되는 변명. 그냥 눈에 띄여서 이게 뭔가 싶어 펼쳐보니 일기장이었고, 읽는 내내 주인이 들이닥치지 않을까? 초조해 하며 읽어 나간다. 읽으면서도 읽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과 싸우고, 주인의 눈치를 살피고 가슴 두근거리며 읽는다. 읽고 나선 곧 후회하지. 몰라도 될 남의 고민 덩어리를 내 가슴에 얹고 말았으니, 없앨 수도 없고, 모른척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버리는 작업이 바로 일기 훔쳐보는 것이다.
그녀의 일기장을 펼치는 내 손가락이 잠시 망설인다. 내가 몰라도 될, 시인 최영미의 고민까지 내가 떠 안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에잇! 그까짓것, 알게 되더라도 모른척 해버리지. 나는 곧 책을 펼쳤다.
하하. 어쩜 시인 최영미의 작은 강박관념이 나와 비슷해서 기분이 좋았다. 바른 문장을 추구하는 성격. 문법에 어긋한 사용법은 나를 찝찝하게 만들기때문에 가능하면 바람직하게 문장을 쓰려 하는 습관. 비슷한 점이 있으니 그녀와 갑자기 친해 진 느낌이었다. 스포츠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면도 비슷하네. 야구랑 축구를 즐기는, 그러나 우리편이 이기길 무한한 애정으로 바라는 모습도 참 비슷했다. 프리랜서 작가이기때문에 일본 입국 심사, 백화점 카드 만들기의 어려움을 겪었다는 글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유명인이 혼자서, 아무도 모르는 속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보통의 의지로는 힘들텐데, 그 어려움을 겪어내는 과정도 안타까웠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등단을 하게 될때, 사람들에게 "패배주의자"로 낙인찍히며 오해를 받아야 했던 속사정을 털어놓을 때는 옆에 최시인이 있다면 "속상했겠어요"라며 어깨를 토닥 토닥해 주고 싶었다.
사랑받았고, 사랑했지만 그 사랑의 정체를 알지 못했던 할머니와의 안타까운 이별을 말해 줄 때는 그런 아픔으로 인해 최시인이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다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분명 그녀는 나보다 어른이고, 나보다 지적이며, 나보다 감수성이 뛰어난 멋진 여인인데 왜 오히려 내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싶었을까? 그녀의 아픈 상처를 솔직하게 나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일까?
그녀의 글을 읽고 그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보다 강해져 있었다. 그녀를 걱정하고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이제는 나를 위로해 주는 문학적 경이로움을 느끼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