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슈이치 이영미 은행나무 요즘 한창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요시다 슈이치가 "감히 나의 대표작이라 하겠습니다"라고 얘기한 소설이다. 소설가가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자신감을 내 보이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메마르고 냉정한 묘사로 유명한 요시다의 소설은 처음인지라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책을 펼쳤는데 처음에는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을 읽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건의 범인은 일찌감치 독자들에게 알려지고 범인의 주변 인물과 그들이 사건에 얽힌 정황, 심리가 묘사 되어 있다. 제목이 악인이기때문에 독자들은 "누가 진짜 악인일까?"를 고민하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허황된 꿈을 접지 않고 몸을 팔아서라도 경제적 여건을 마련하며 상대방의 순수한 마음을 악을 쓰면서 짓밟는 잔인한 여자가 악인인가? 타인의 감정을 존중할 줄 모르고 자신의 기분에 따라 사람을 이용하고 이용가치가 떨어졌을때 인정사정 볼 것없이 패대기치는 남자가 악인인가? 억울한 누명을 쓸 것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여자를 살해하고 또 다른 여자와 도피 행각을 벌이는 남자가 악인인가? 살인자인줄 알면서도 끝까지 그의 행위를 믿어주고 사랑을 싹틔우며 도피를 도와주는 여자가 악인인가? 실제 사형제도는 있지만 긴 시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사실상 사형제도 폐지 국가에 해당되는 우리나라에 요즘 진짜 악인이라 불리는 범인들이 늘어가고 그들에게 사형이 구형,선고되기도 한다. 사형제도폐지를 두고 토론을 할 때 반드시 나오는 근거는 만약에 오판이라면 어떻게 할 거냐는 것이다. 이미 죽어버리고 나면 무죄인들, 형량이 다소 가벼워 진들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다. 사형수를 살펴보면 인텔리 계층, 권력층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다들 못 배우고, 못 먹는, 생계 유지 자체가 힘든 계층과 어릴 적 불우한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하지 않는가? 소설 속의 유이치처럼 친부모에게서 버림 받아 잊을 수 없는 큰 고통과 상처를 가진 어린 영혼의 불우함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없다는 말인가? 악인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원초적인 대전제를 만들어 내려고 했던 요시다 슈이치가 다소 극단으로 설정한 인물의 과거이고 어릴 적 상처를 극복한 훌륭한 대다수가 많은 이 사회에서 그것이 면죄부는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약자의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으며 그들의 삶을 건강한 삶의 테두리에 넣어두고 치료해주고 도와주려는 사회적 시스템이 하루 빨리 완성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윤수에게 한없이 향하던 안타까움, 애정이 그대로 "유이치"에게 옮겨가는 느낌이 들었다. 선인과 악인으로 나누는 잣대는 과연 무엇일까? 그 잣대의 정확도와 공정성은 누가 마련해 주는 것일까? 한동안 많은 생각을 갖게 해 줄 요시다 슈이치의 "대표작", 읽기를 잘 했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