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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작가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후 그의 삶을 글로 정리하게 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시작된 작업은 더디었고, 희미해진 기억을 살리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에 자칫 미화되거나 가족간의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첨부할수도 있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삶을 어떠한 꾸밈도 없이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싶어했다. 단순하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알리고 싶다던 그녀의 바람대로 이 책은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로 쓰여졌다. 하지만 화려한 수식어도 없고, 아름다운 내용이 없음에도 자꾸만 문장 하나하나에 가슴이 울리고 아프고 감동받게 된다. 때론 딸의 입장에서, 때론 아버지의 입장에서 책을 읽게 된다. 비록 살았던 시대와 나라는 달랐지만 이 책은 누구나 공감할만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특별한 사람의 영웅담이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한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끝났어" 란 말로 아버지의 임종을 알렸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이별은 통곡과 충격으로 소란스레질 법도 하지만 아니 에르노가 묘사하는 그 순간은 지나치릴만큼 담담하다. 친척들이 찾아와 위로하고 장례를 치르고 아버지의 시신이 거둬지는 모습이 마치 제 3처럼 쓰여졌다. 돌아가신지 몇 시간도 안 되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아버지의 얼굴, 시신에서 났던 끔찍한 악취 등은 굳이 자세히 쓸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그녀가 쓰고 싶었던 글이었다.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아름답게 기리는게 아니라, 때론 부끄럽고 치부를 드러내는 것 까지도 솔직하게 쓰길 원했다. 가난으로 인한 부끄러움과 배우지 못한 열등감은 숨기고 싶어하는 것들이지만 그녀는 오히려 드러냈다. 그래야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할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읽고 쓰지 못했던 할아버지는 가난한 수레꾼 이었고, 아버지도 가난 때문에 일찍 일터로 나가야 했다. 오로지 먹고 사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그 시절의 처참한 가난은 역사책속에서만 보던 그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불평 하지 않고 약간의 돈만 받아도 열심히 일했다. 모두들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농가, 공장의 직공, 기와장이를 거쳐 작은 가게를 운영하기에 이른다. 부모의 가난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며 착실히 일한 결과였지만 언제 다시 노동자 신세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옥죄었다. 가게 형편이 나빠져 다시 공장에 들어가야 했고, 전보다 더 바쁘게 일하느라 몸과 마음은 지쳐갔지만 노력의 결실은 그들을 노동자로 돌아가게 하지 않았다.
먹고 살기 바빴고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아니 에르노의 아버지 마음이 절절히 공감된다. 불과 몇십년 전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배우지 못한 아픔을 자식이 닮지 않기를 바랐고,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시키고 뒷바라지를 한 부모님들 말이다. 그렇게 아이들은 고등교육을 배우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지만, 이는 곧 부모와의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학교 공부를 물어보고 싶어도 부모는 아는게 없고, 세련된 학교 선생님들과 어른들을 경험하면서 배우지 못한 부모가 창피하게 느껴지고 대화도 통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부모는 아이들이 많이 배워 성공하길 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거리감과 단절을 야기한 것이다. 아이의 입장에선 어린 시절엔 너무도 커 보이고 멋져보였던 부모님의 모습이 왠지 초라하고 작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의 부모님들, 특히 아버지는 언제나 근엄하고 무뚝뚝했으니 사랑 같은 건 느낄수가 없었다.
그런 경험을 아니 에르노도 경험했다. 마치 윽박지르는 것 처럼 큰 소리로 말하고 혼내고 딸의 학교 생활은 아는게 없으니 조언도 해줄수 없었다. 사진에 남겨진 아버지의 모습은 한번도 웃은적이 없고 무뚝뚝하기만 했다. 세상 사람을 자신의 가게에 오는 손님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고, 친척과 이웃들이 가지지 못한 걸 소유하길 바라면서도 욕 먹지 않기 위해 처신했다. 정원 가꾸는 걸 중요하게 여기고 간소한 식사를 하는 등의 아주 소소한 일상까지 적은 이 책을 통해 평범하지만 위대한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비록 부드럽게 말하는 법도 모르고 여러 모순점도 가졌지만 정말 열심히 살았고 어쩌면 유일한 하나의 꿈을 이뤄냈으니 말이다. 딸이 자신의 아내처럼 가난한 직공에게 시집가길 원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꿈 말이다. 딸이 자신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이뤄졌을 때 그는 분명 기뻐했을 것이다. 평생 감정을 숨기며 살아왔기에 기쁜 내색을 하진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낯익어서 자꾸만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었고, 입 밖으로 소리내게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