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속임 그림 - 트롱프뢰유, 실재를 흉내 내고 관객을 속이다
이연식 지음 / 아트북스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발음하기도 어렵고 익숙하지 않은 트롱프뢰유는 '눈 속임'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 인물이나 사물인줄 알고 깜짝 놀라게 하는 그림을 일컫는다. 미술 자체가 실제를 반영하지만 그 수단이 속임수 일수밖에 없는데, 트롱프뢰유는 미술의 이런 측면을 극대화 했다고 볼수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실제인양 깜빡 속아넘어 가게 만들려면 웬만한 실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거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기대를 갖고 보게 됐는데,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어설프거나 속아넘어가지 않을 법한 그림들이 많았다. 유명한 트롱프뢰유 라도 관객이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드물고,대부분은 실제인지 그림인지 긴가민가 하게 만들다 몇초후에 그림임을 알아차리게 하기 때문이다. 누가봐도 그림임을 확신하지만,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 어느 부분이 그림이고 실제인지를 헷갈리게 만드는 재미를 주기 때문에 완벽하진 않아도 보면 볼수록 재미가 있는 것 같다.  

이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진짜라고 믿게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의 법칙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관객이 잘 아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 진짜를 알고 있어야 진짜인듯한 그림에 속아넘어가니까 말이다. 그리고 묘사가 용이하고, 묘사 했을 때 그럴 듯하게 보일법한 것을 그리는데 살아있는 걸 진짜처럼 그리는건 어렵기 때문에 주로 정물화가 채택됐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은 것과 산것을 한 화면에 담은 사냥물 그림이 그려졌고, 나중엔 '매달린 사냥물'이 많이 나오게 됐다.  

 

  

왼쪽의 그림은 장 바티스트 우드리의 《곤충이 있는 정물》인데, 죽은 새와 나비는 그려진 가짜임이 분명하지만 그림 속에선 어느게 산것이고 죽은 것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오른쪽 그림은 야코포 데 바르바리의 《자고새와 쇠장갑이 있는 정물》사실상 트롱프뢰유의 시초로 여겨진다. 금속, 깃털의 다른 질감을 통해 대조 효과가 잘 드러나게 하는데 쇠와 나무도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밑에 쪽지가 그려져 있는데, 못과 쪽지는 둘다 표면에 바짝 붙어있어 속이기도 쉽고 그만큼 위협적이다. 종이에 화가의 서명과 제작년도가 적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왼쪽의 야콥 코르넬리스 판 오스차넌의 《자화상》은 그림 안과 밖을 교란하는 트롱프뢰유의 전형적인 예인데, 쪽지가 진짜라면 그림은 가짜일수밖에 없다. 그림 안에 있는 쪽지가 아니라 그림 안팎을 교란하는데 이런 쪽지를 '카르텔리노'라고 한다. 쪽지가 실제에 가깝게 그려졌기 때문에 나머지 부분이 그려진 사실이 두드러지게 된다. 오른쪽 그림은 코르넬리스 헤이스브레흐츠의 《바니타스 정물화가 걸려 있는 아틀리에 벽》이다. 제목의 바니타스는 갈구하는 물질적 욕망과 호화로움과 쾌락은 언젠가 모두 쇠락하고 소멸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헤이스브레흐츠의 그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바니타스 주제가 실린 작품은 그동안 많이 봐왔는데 이 작가의 그림이 트롱프뢰유에 속해있다는게 신기했다. 그동안 다른 책에서 트롱프뢰유 라는걸 보지 못했는데, 내가 알던 그림이 눈속임 그림이라는게 재미있게 느껴졌다.  

 

가장 재미있었던 건 그림 위에 파리가 그려진 것이었다. 어느 화가의 《화가와 그의 아내》에선 식탁에 앉은 아내의 흰 천 위에, 그릇 옆에 파리가 그려져있다. 아마 사람들은 이 그림을 처음 봤을때 그림 위에 파리가 앉은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파리 그림은 15세기 초부터 널리 그려졌는데 종교화에도 그려지게 된다. 그리기 쉬우면서도 실제처럼 느끼게 해 관객을 잠깐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트롱프뢰유는 재미가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제 그림은 화면 밖으로 나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오른쪽의 아돌프 장 프랑수아 달마뉴의 《자화상》처럼 프레임을 타 넘는 그림은 입체적으로 보이며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리기 용이하고, 화려하고 다채로워 효과가 좋고, 주변에서 쉬이 보고 접할수 있는걸 소재로 찾고 있는데 편지꽂이와 함께 선반이 이 조건을 충족시켰다. 다양한 질감을 표현할수 있고, 바니타스를 넣을수 있으며, 트롱프뢰유의 소재로 쓰인 모든것을 그릴수도 있는데 케네스 데이비스의 《책장》과 앙리 카디우의 《부엌의 선반》은 현대인들이 좋아할 트롱프뢰유로, 사진 같은 그림이다.  

1960년대의 하이퍼리얼리즘은 트롱프뢰유와 비슷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보고 그린 하이퍼리얼리즘은 속이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속임수가 드러내도록 하는데 반해, 트롱프뢰유는 속임수가 얼른 드러나지 않도록 하려는 그림으로 다른 성격을 띈다.  '실제인 양 속이는 그림이 아니라 '실제에 매우 가깝게 그린' 그림이 하이퍼리얼리즘 인데, 개인적으론 이쪽에 많은 흥미가 생긴다. 트롱프뢰유는 사진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레 쇠락의 길을 걷게 됐는데, 뱅크시를 비롯한 예술가들의 건물 벽화를 통해 열린 공간으로 나오고 있다. 캔버스가 아닌 다양한 변화를 통해 화가와 관객간의 속고 속이는 재미있는 유희가 앞으로도 더 많이 생겼으면 한다. 이런 속임은 유쾌함을 안겨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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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랑 2012-07-22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완전 재밋었어용 이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