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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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는…… 아주 가벼워요. 나는 아주 가벼운 사람입니다. - p.17]

  

  이탈리아 미래파 작가, 알도 팔라체스키가 1911년에 출간한 대표작인 『연기 인간』. 국내에 소개된 이탈리아 작가는 그리 많지 않고, 그나마 내가 아는 작가는 단테, 보카치오, 칼비노, 그리고 타부키 정도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이지만(실제로도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라고 한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서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문구에 나도 모르게 끌렸다. 10년 전에 읽었지만 지금도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소설로 남아있는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쿤데라는 각기 다른 네 사람을 내세워 인생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은 무엇이며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다. 다만 팔라체스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생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을 대비시킨다. 


[페렐라 씨, 당신 이름이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다들 연기 인간 얘기만 하고 있어요! 페렐라! 페렐라! 여기도 페렐라, 저기도 페렐라. - p.34]


  주인공 페렐라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인간이다. 그는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 연기에서 탄생했다. 말그대로 온몸이 연기로 이뤄진 연기 인간이다. 이 연기는 페나(고통), 레테(그물), 라마(창)라는 노부인 셋이서 피운 불에서 생겨난다. 주인공은 그들의 이름 앞글자에서 따와 ‘페렐라’란 이름으로 불린다. 굴뚝 안에서 33년을 지내면서 세 노부인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배운다. 어느 날 갑자기 노부인들의 대화가 끊기자 3일을 기다린 그는 3일을 기다리다가 굴뚝 밖을 벗어난다. 벽난로 앞에 있던 신발을 신은 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페렐라는 왕궁으로 간다. 여러 사람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페렐라를 믿고 국왕은 그에게 중책을 맡긴다. 새로운 법전을 집필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궁정 하인장인 알로로가 페렐라처럼 되고 싶어 분신했다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페렐라를 향한 호의적인 의견은 순식간에 반전되고 만다.


  사람 셋이 짜고 우기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에 딱 들어맞는 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페렐라라는 존재는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르지 않은 일관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그를 찬양했다가 비난하고 모욕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대중이다. 알로로가 왜 죽었는지 논의하다가 "아마 자신처럼 '가벼워지고 싶어서'"라고 의견을 냈다가 이내 싸늘한 시선, 아니 뭇사람들에게서 분노를 감내하는 페렐라. 연기처럼 희미한 그는 아직 세상 사람들에게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인 것만 같다. 필요할 때는 페렐라를 찬양했다가 나중에 힐난조로 돌아서는 사람들의 모습은 토사구팽의 전형 같기도, 카뮈의 소설 『이방인』 2부에서 뫼르소가 재판받을 때 군중들에게 야유를 받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팔라체스키가 이탈리아 미래주의의 대표적 작가인 걸 고려하면 아마 연기 인간인 페렐라는 발달한 과학 기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통일도, 산업화도 늦었던 조국 이탈리아가 아직 이질적인 문명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은유적으로 표현한 건 아닐까? 연기 인간이 탄생한 지점도 흥미롭다. 작중에서 강조되는 3이란 숫자는 기독교에서 신성시하는 삼위일체와 관련 있다. 그리고 불은 인간이 문명 생활을 시작하는 데 가장 큰 수단이 되지 않았나. 그리스 신화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불을 몰래 훔쳐 인간에게 불을 다루는 법을 알려줬다가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는 영원한 형벌을 받았다. 어느 때보다 역동적이었던 20세기 초를 상징하는 주인공 페렐라의 기원을 결국 서양 문명의 양대 기둥인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 교리에서 찾은 게 퍽 역설적이면서도, 곧장 납득이 되었다.  


[사람들은 인생의 가장 나쁜 순간에 죽습니까, 아니면 죽음이 인생의 가장 나쁜 순간입니까? - p.145]



덧1. 기존 사조를 답습하는 걸 거부하고 새롭고 신선함을 상징하는 미래주의의 대표작 답게 책에서도 여러 실험적 기법이 눈에 보인다. 소설이지만 희곡처럼 대화 위주로 전개된다. 연기처럼 응집력 없이 여러 장면이 빠르게 전환되기에 서사를 놓치기 쉬우나, 서사 자체는 간단하지만 페렐라를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 변화에 중점을 두고 읽어야할 듯하다.


덧2. 대화가 많기에 어찌 됐든 어려운 주제에 비해 가독성은 좋은 편이다. 실험적인 소설에 어울리게 책의 표지는 AI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 뒤섞이지 못하고 연기처럼 희미하게 살아가는 페렐라를 표현한 데엔 제격인 듯 싶다.  



*. 문예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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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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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기밀 문서가 해제되면서 커밍스가 처음에 주장한 내전 성격이 강했던 한국전쟁은 설득력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한국전쟁에 관련한 연구 중 기념비적인 저작임은 간과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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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 - 중국인들의 한국전쟁
백지운 지음 / 창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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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인 순망치한(脣亡齒寒)은 한국과 중국 관계에서 특히 자주 볼 수 있는 말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건 당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고, 일본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정복하기 전 조선을 침공하자 원군을 파병했다. 우리에겐 임진왜란으로 익숙한 이 전쟁을 중국에선 항왜원조(抗倭援朝), 즉 왜구에 대항하여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 부른다. 이를 감안하면 20세기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중국에선 어떻게 부르는지 유추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인 항미원조(抗美援朝)는 미국에 대항하여 (북)조선을 도운 전쟁이란 뜻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이후 반중 감정은 어느덧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듯 싶다. 하지만 이웃 나라인 한국에서 반중 감정은 훨씬 이전부터 만연했다. 사드 배치 이후 한한령과 경제 보복, 그리고 이전부터 북한 문제에 관여하는 걸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한국 청년들의 반중, 아니 혐중 정서가 그 어느 세대보다 높은 건 당연한 수순 같다. 이에 질세라 중국에서도 가장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성향이 짙은 세대가 바로 청년층이라고 한다. 이들이 자라온 21세기에 중국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고, 전문가 사이에서 의견은 분분하지만 미국을 꺾을 가능성이 그나마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국뽕' 콘텐츠는 우리나라에서도 유튜브 검색 만으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 특성 상 이런 민간 저작물마저 공산당에서 시행하는 검열과 통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장진호>가 중국 국내 흥행 1위를 달성한 것 역시 국가 정책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사실 이 소재를 다룬 대중 매체가 큰 호응을 얻고, 중국에서 항미원조라는 명칭을 버젓이 사용하는 게 대한민국의 청년 처지에선 굉장히 아니꼽고 불쾌한 게 사실이다. 중공군이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지만 않았어도 전쟁이 고착화되고 한반도가 아직도 분단 상태로 남아있진 않을 확률이 높아서 그렇다. 


  한국전쟁을 흔히 '잊힌 전쟁'이라고 한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기에 벌어진 첫 전쟁이었고 세계 질서에 미친 파급력이 상당했다. 그렇지만 미국이 참전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할리우드 영화 같은 대중 매체에서 주목받지 못했고, 전쟁이 공식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탓일 것이다. 중국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문화대혁명 떄 숙청당했다. 이후 그가 활약한 한국전쟁을 언급하는 건 금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덩샤오핑 시대 때 펑더화이가 복권됐지만, 중국은 소련과 이념 분쟁을 겪고, 데탕트 이후 미국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 미국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항미원조 전쟁을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었다. 미국의 도움을 받아 2001년 WTO에 가입한 중국은 전례없이 성장하며 미국을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엔 영국과 러시아, 20세기엔 미국과 소련이 있었다면 21세기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국에서 정권이 교체돼도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이후 중국 견제는 초당파적 성격을 띄게 됐다. 이제 중국 입장에서 항미원조를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장진호> 외에도 우리나라에선 이름만 접할 수 있는 중국의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가 무엇이 있으며 어떤 양상으로 변모했는지 소상하게 알 수 있었던 게 이 책의 장점이다. 21세기 들어 잊힌 전쟁인 항미원조를 본격적으로 되살리는 건 대국굴기를 외치는 중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듯 싶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났다지만 어쨌든 당시에도 최강대국인 미국은 중국과 북한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명제대로 중국은 과거를 이용해 현재와 미래를 아주 착실히 설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책의 중심내용은 단순히 항미원조라는 말의 연원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다른 명칭을 사용할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왜 지금 항미원조인가'하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고래 사이에 끼인 새우 처지인 우리나라가 이 본질을 간과해서는 안될 거 같다.



*. 창비 출판사에서 모집한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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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2023.4 202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브누아 브레빌 외 지음 / 르몽드디플로마티크(잡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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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4월호 서평 이벤트에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장기화, 고착화되면서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국제 뉴스도 다양해지는 듯하다. 전쟁을 제외하고 올초부터 지금까지 가장 파장이 크고 어떻게 마무리될지 가늠이 안되는 사안을 꼽아보자면 단연 프랑스 연금개혁안을 둘러싼 갈등일 것이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프랑스 시사 월간지인데, 이 사안을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했다. 워낙 큰 사안이니만큼 이번 호에도 비중있게 다뤘다.

월초에 인쇄, 배송되는 이 월간지의 특성상 프랑스 원문 기사는 아마 3월 중순쯤에 마감됐을 거 같다. 4월 15일자로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 개혁 법안에 서명하고, 17일에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21일 인터뷰에서 국민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채 절차가 진행된 게 유감이라고 말했지만 더 큰 파장으로 이어질 게 확실하다.

다음 호에서 후속 기사가 궁금하지만 이번 호 기사로 정리된 게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프랑스 역시 노령화와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 구조 문제를 겪고 있다. 수십 년 전에 설계된 연금 구조로는 감당할 수 없이 적자가 불어난다. 더이상 늦기 전에 이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다만 개인 권리 행사를 몹시 중요하게 여기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프랑스 국민에겐 좀처럼 납득할 수 없는 일인듯 싶다.

한국에서도 연금개혁안은 시한폭탄 같은 문제다. 누군가는 해결해야할 문제지만 정치인이 지지율 깎아먹힐 각오를 하고 이를 쟁점화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소신있게 이를 강행한 마크롱 대통령에게 존경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마크롱은 민주주의의 핵심이 공론화 과정에 있다는 걸 간과했다. 아무리 본인이 후보자 시절부터 내세웠던 공약이고, 여기서 더 늦아지면 손도 쓸 수 없을 거란 조바심이 들었다고 해도 국민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절차와 설득을 내세우지 않았다.

사실 노란조끼 시위와 국민전선 후보였던 르펜에게 이전 선거보다 더 적은 격차로 승리했다는 점에서 마크롱은 이제 잃을 게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에서 아무리 시위가 전국적으로 흘러갔더라도 결국 정부가 원하던 대로 관철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칠 사안을 이렇게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게 마크롱 본인의 정치 인생은 물론, 앞으로 프랑스에 얼마나 좋게 작용할 지는 모르겠다. 다른 나라에 미칠 파장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 연금 문제는 주로 연령 갈등, 즉 청년층 대 중장년층이 대립하는 걸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은 연금 문제를 계층 문제로 보는 거 같다. 은퇴 시기와 연금 수령 시기가 늦춰지는 건 육체 노동자와 중산층 이하에게 더욱 치명적인 탓이다. 한국 언론은 지금 청년 세대 내에서 성별 갈등을, 그리고 세대 간 갈등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양극화가 전세계적으로 심해지는 추세에 우리 역시 계층 문제에서 자유롭진 않아 보인다. 우리는 인종, 종교 문제를 겪지 않으니 한 번 계층 문제가 폭발하면 수습이 안될 정도로 커질 거 같다. 프랑스 문제가 그저 남의 나라 일로 두고볼 게 아닌 거 같아 씁쓸하고, 안타깝고, 겁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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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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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이다."

주인공 주디스 헌은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에 산다. 이제 40대에 접어든 여성이며, 미혼이고, 다른 가족은 없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주디가 늦게까지 결혼하지 못한 이유는 뇌졸중과 치매에 걸린 이모를 간병했기 때문이다. 간병 생활에 치여 직업 기술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도 주디의 초라한 행색, (책에 나온 묘사를 감안하면) 호감가지 않는 얼굴, 맥없는 대화 능력이 너무 큰 장애물이다.

그런 주디에게도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새로운 하숙집에서 다른 하숙인들과 만나는 첫 식사 때 매든이란 남성을 만난다.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온 매든에게 주디는 끌린다. 자신을 피하지 않고 대화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든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다가 좌절을 맛보고 돌아온 사람이다. 매든이 호감을 느낀 건 사실 주디가 아니라 주디가 착용한 값비싼 장신구다. 주디도 호감에 빠져 매든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와 한쪽 다리를 전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주디의 삶이 변화할 조짐을 보였지만 찰나로 끝이 난다. 관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인생은 좀처럼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주디의 마음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고 열정으로 불타올랐지만 결국 한때다. 남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한 그녀는 항상 외롭다.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도 알아줄 사람이 없다. 주디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술이다. 술에 빠져 의존은 더욱 심해진다.

이렇게만 보면 독자들이 주디에게 연민을 품기 쉽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주디의 망상을 보면 외롭고 쓸쓸한 주인공을 마냥 좋게만 생각해주기 힘들다. 물론 주디가 이렇게 고립된 건 본인탓이 아니지만, 독자들이 주디를 이해하더라도 마냥 공감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가 떠올랐다. 독립 직후 아일랜드 내전을 소재로 인물 간 갈등을 비유적으로 형상한 것처럼, 이 소설도 고립된 섬 자체인 아일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와 영국의 갈등이 언제나 수면 밑에 잠겨있지만 금방이라도 폭발할 거 같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를 배경으로 한 건 작가의 가장 큰 의도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 을유문화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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