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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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뿐이다."

주인공 주디스 헌은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에 산다. 이제 40대에 접어든 여성이며, 미혼이고, 다른 가족은 없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주디가 늦게까지 결혼하지 못한 이유는 뇌졸중과 치매에 걸린 이모를 간병했기 때문이다. 간병 생활에 치여 직업 기술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도 주디의 초라한 행색, (책에 나온 묘사를 감안하면) 호감가지 않는 얼굴, 맥없는 대화 능력이 너무 큰 장애물이다.

그런 주디에게도 좋은 기회가 찾아온다. 새로운 하숙집에서 다른 하숙인들과 만나는 첫 식사 때 매든이란 남성을 만난다.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온 매든에게 주디는 끌린다. 자신을 피하지 않고 대화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든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다가 좌절을 맛보고 돌아온 사람이다. 매든이 호감을 느낀 건 사실 주디가 아니라 주디가 착용한 값비싼 장신구다. 주디도 호감에 빠져 매든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와 한쪽 다리를 전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주디의 삶이 변화할 조짐을 보였지만 찰나로 끝이 난다. 관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인생은 좀처럼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주디의 마음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고 열정으로 불타올랐지만 결국 한때다. 남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한 그녀는 항상 외롭다.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도 알아줄 사람이 없다. 주디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사람이 아니라 술이다. 술에 빠져 의존은 더욱 심해진다.

이렇게만 보면 독자들이 주디에게 연민을 품기 쉽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주디의 망상을 보면 외롭고 쓸쓸한 주인공을 마냥 좋게만 생각해주기 힘들다. 물론 주디가 이렇게 고립된 건 본인탓이 아니지만, 독자들이 주디를 이해하더라도 마냥 공감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작가의 의도가 아닌가 싶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가 떠올랐다. 독립 직후 아일랜드 내전을 소재로 인물 간 갈등을 비유적으로 형상한 것처럼, 이 소설도 고립된 섬 자체인 아일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와 영국의 갈등이 언제나 수면 밑에 잠겨있지만 금방이라도 폭발할 거 같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를 배경으로 한 건 작가의 가장 큰 의도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 을유문화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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