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 - 중국인들의 한국전쟁
백지운 지음 / 창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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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인 순망치한(脣亡齒寒)은 한국과 중국 관계에서 특히 자주 볼 수 있는 말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건 당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고, 일본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정복하기 전 조선을 침공하자 원군을 파병했다. 우리에겐 임진왜란으로 익숙한 이 전쟁을 중국에선 항왜원조(抗倭援朝), 즉 왜구에 대항하여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 부른다. 이를 감안하면 20세기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중국에선 어떻게 부르는지 유추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인 항미원조(抗美援朝)는 미국에 대항하여 (북)조선을 도운 전쟁이란 뜻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한 이후 반중 감정은 어느덧 보편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듯 싶다. 하지만 이웃 나라인 한국에서 반중 감정은 훨씬 이전부터 만연했다. 사드 배치 이후 한한령과 경제 보복, 그리고 이전부터 북한 문제에 관여하는 걸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한국 청년들의 반중, 아니 혐중 정서가 그 어느 세대보다 높은 건 당연한 수순 같다. 이에 질세라 중국에서도 가장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성향이 짙은 세대가 바로 청년층이라고 한다. 이들이 자라온 21세기에 중국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고, 전문가 사이에서 의견은 분분하지만 미국을 꺾을 가능성이 그나마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국뽕' 콘텐츠는 우리나라에서도 유튜브 검색 만으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 특성 상 이런 민간 저작물마저 공산당에서 시행하는 검열과 통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장진호>가 중국 국내 흥행 1위를 달성한 것 역시 국가 정책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사실 이 소재를 다룬 대중 매체가 큰 호응을 얻고, 중국에서 항미원조라는 명칭을 버젓이 사용하는 게 대한민국의 청년 처지에선 굉장히 아니꼽고 불쾌한 게 사실이다. 중공군이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지만 않았어도 전쟁이 고착화되고 한반도가 아직도 분단 상태로 남아있진 않을 확률이 높아서 그렇다. 


  한국전쟁을 흔히 '잊힌 전쟁'이라고 한다.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기에 벌어진 첫 전쟁이었고 세계 질서에 미친 파급력이 상당했다. 그렇지만 미국이 참전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할리우드 영화 같은 대중 매체에서 주목받지 못했고, 전쟁이 공식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탓일 것이다. 중국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문화대혁명 떄 숙청당했다. 이후 그가 활약한 한국전쟁을 언급하는 건 금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덩샤오핑 시대 때 펑더화이가 복권됐지만, 중국은 소련과 이념 분쟁을 겪고, 데탕트 이후 미국과 외교 관계를 정상화했다. 미국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항미원조 전쟁을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었다. 미국의 도움을 받아 2001년 WTO에 가입한 중국은 전례없이 성장하며 미국을 위협할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엔 영국과 러시아, 20세기엔 미국과 소련이 있었다면 21세기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국에서 정권이 교체돼도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이후 중국 견제는 초당파적 성격을 띄게 됐다. 이제 중국 입장에서 항미원조를 언급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장진호> 외에도 우리나라에선 이름만 접할 수 있는 중국의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가 무엇이 있으며 어떤 양상으로 변모했는지 소상하게 알 수 있었던 게 이 책의 장점이다. 21세기 들어 잊힌 전쟁인 항미원조를 본격적으로 되살리는 건 대국굴기를 외치는 중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듯 싶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났다지만 어쨌든 당시에도 최강대국인 미국은 중국과 북한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카의 명제대로 중국은 과거를 이용해 현재와 미래를 아주 착실히 설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책의 중심내용은 단순히 항미원조라는 말의 연원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다른 명칭을 사용할 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왜 지금 항미원조인가'하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고래 사이에 끼인 새우 처지인 우리나라가 이 본질을 간과해서는 안될 거 같다.



*. 창비 출판사에서 모집한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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