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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식탁 - 자연이 허락한 사계절의 기쁨을 채집하는 삶
모 와일드 지음, 신소희 옮김 / 부키 / 2023년 10월
평점 :
이건 실험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에 유행하면서 인류는 그간 자연에 끼쳐왔던 해악을 반성해볼 계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팬데믹을 겪고도 그닥 달라지는 건 없었다. 코로나와 기후 위기가 현실이라면, 매년 블랙 프라이데이쯤부터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맞이까지 이어지는 염가 쇼핑에 목매는 우리 삶 역시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아니 인류가 위험에 처했다한들 결국 우리 삶의 양식이 좀처럼 쉽게 바뀔 거 같진 않다. 여느 사람은 대부분 이 대목에서 '현타'를 느낄 법하건만 이 책 『야생의 식탁』의 저자 모 와일드는 달랐다. 누구나 한번 쯤은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정작 머리 속으로만 그리는 것과 정말로 실천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인간과 지구의 단절을 치유할 방법으로 온전에 자연에 몰입하기"를 꼽는 저자는 주저없이 행동에 나섰다. 일 년동안 야생식만 먹기다.
일 년 동안 야생식으로 생존하기 위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오로지 야생식만 먹으며, 다양한 서식지를 돌아다녀 현지 식량을 구하고, 돈은 쓰지 않으며, 야생 조류 대신 직접 유기농으로 방목하여 키운 암탉이 낳은 달걀을 먹고, 물물교환으로 필요한 식량을 구하기도 하며, 제철 음식을 먹되 필요한 경우 보존식도 섭취하는 식이다. 일반인이 시도하기엔 당장 굶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조건들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오랫동안 약초를 연구하며 야생식에 관심을 키워왔다. 자신이 공부한 분야를 단순히 이론으로만 배우지 않고 실생활에 적용하여 체득하는 모습은 참된 연구자의 귀감 같아서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정말 이런 생활이, 그것도 일 년이나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계속 들었다.
다행히 기우였다. 스코틀랜드하면 연상되는 이미지는 시도 떄도 없이 부는 비바람과 나무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고 이끼류만 무성한 땅이다. 아직 스코틀랜드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기후와 식생이 비슷한 아일랜드는 가 보았다. 최대 도시인 더블린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방금 내가 언급한 풍경이 실제로 그려졌다. 스코틀랜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앵글족과 색슨족에게 밀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등지로 밀려난 켈트족이 참 힘든 생활을 겪었겠구나 싶었다).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식량을 어떻게 자급자족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내 생활 방식이 만들어낸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
서문에서 저자가 밝히는 바에 의하면, 우리는 쌀, 밀, 옥수수와 같은 단일 작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주식으로 삼는 이런 작물 외에도 대두, 감자와 같은 재료를 가공한 식품도 많이 섭취한다. 인간이 유목 생활을 했을 때 일 년 내내 풍족하게 먹고 살진 못했다. 계절에 따라 이동해가며 주어진 환경에 맞는 식량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때 먹었던 식량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지금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지만 반대로 풍부한 재료에서 오는 미식의 즐거움은 잃어버린 셈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주장한 대로 우리가 쌀과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쌀과 밀이 우리를 길들인 셈이다. 미래의 우리 모습을 그린 SF 작품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단일 작물에 의존하는 인류의 모습이 곧잘 묘사된다. 기술이 발달해서 단일 작물만을 섭취해서 얻는 영양 불균형은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미식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우리 모습이 그리 즐거울 거란 생각이 들진 않는다.
이 책에서 나온 자급자족하는 삶은 얼마 전에 관람한 영화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여덟 개의 산〉과 〈약속의 땅〉에는 힙겹지만 산과 들에서 어떻게든 삶을 이어나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메뉴의 즐거움 - 트와그로 가족〉에서는 제철 음식과 자연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메뉴를 개발하고 조리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언제든 음식을 손쉽게 구할 수 있음에도 영양학적으론 불균형을 초래하는 지금 우리의 식단은 '풍요 속의 빈곤'이란 말이 알맞을 거 같다. 『의자의 배신』에 따르면 오늘날 전세계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성인병은 산업 사회 이후 지금의 생활 양식이 우리에게 정착한 이후부터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농경 생활을 하기 전 인간은 유목과 채집을 하며 살았다. 불안한 우리 미래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과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 부키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 이벤트에 선정되어 이 책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