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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를 날리면 - 언론인 박성제가 기록한 공영방송 수난사
박성제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평점 :
‘만나면 좋은 친구’는 어느 순간 ‘엠병신‘이 되어 있었다. 몇 안되는 한국 공영방송 중 하나인 MBC 이야기다. 중고등학생 때 매주 토요일을 기다렸던 건 어후 6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무한도전> 때문이었다. 내겐 ‘놀토’보다 ‘무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한도전이 결방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 몇 주가 되고, 몇 주가 몇 달까지 늘어났다. 방송국 파업 때문에 무도가 결방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파업이 정작 무엇 때문에 일어난 건지는 몰랐다. 사실 그때 내게 중요한 건 MBC 파업의 이유보단 최애 예능이 언제 방영을 재개할지였다. 무기한 길어지던 파업으로 짜증이 많이 났던 기억이 난다.
한때, 가장 시청자가 가장 신뢰하던, 가장 즐겨 보던 방송사가 MBC였다고 한다. 정권의 눈밖에 난 엄기영 사장이 해임되고, 김재철, 김장겸 사장 체제에서 MBC는 예전 모습을 잃고 점점 빛이 바래갔다. 대표적 낙하산 인사였던 이들은 MBC가 공영방송로서 본분을 지키고 소임을 다하기보다는 정권의 편의에 맞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에 내부 반발은 극심했다. 그리고 크게 반발했던 이들일수록 회사 입당에선 더 골칫거리였다. 결국 이들 중 상당수가 해직되었다. 이 책의 저자 박성제도 해직되었다.
2012년 해직 언론인이 된 입사 20년차 기자는 수제 스피커를 만들다가 6년이 지나서야 직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보도국장이 된 그는 망가진 MBC를 다시 살려내야 했다. 세월호 관련 보도로 신뢰율 바닥을 찍었던 MBC가 해야 했던 건 기본에 충실하는 것이었다.
최승호와 이후 보도국장에서 새로 사장이 된 박성제 체제 하에서 MBC는 사립 유치원 비리와 김용균 씨 사망 사고를 꾸준히 보도했다. 다른 방송사가 주목하지 않았던 이슈였다. 이 보도는 유치원 3법과 중대재해처벌법 개정에 크게 기여했다. 버닝썬 게이트를 공론화해 연예계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기도 했다. 고성 산불 보도 때에는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특보를 편성해 실시간 상황을 전달했다. 공영방송으로 책임을 다하는 자세에 시충자들도 다시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뉴스는 원상복구했지만 MBC는 여전히 예능과 드라마 부문에서 맥을 못추고 있었다. OTT가 유행하는 요즘 추세에 맞게 <피의 게임> <피지컬 100> <나는 신이다> 같은 프로를 OTT 전용 예능을 기획, 제작해 MBC의 역량을 드러냈다. 선택과 집중을 발휘해 드라마 수를 줄이는 대신 질을 높였다. 적자가 흑자로 돌아섰다.
조국 사태, 핵심 참모진 자가 보유, LH 비리, 공군 성폭력에 관한 보도로 정권을 향항 비판도 소홀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문재인에서 윤석열로 바뀌었어도 MBC는 언론의 본분을 다했다. 대통령 전용기 민간인 탑승 건, 이태원 참사 보도로 정권의 잘못을 강도 높게 비판하던 MBC는 유튜브로 이른바 대통령의 “바이든-날리면” 발언을 언론 중 가장 빠르게 보도했다. 그 이후 MBC는 청와대와 여당, 각종 보수 단체에 ‘가짜 언론’으로 낙인 찍혀 홍역을 치뤘다. CNN을 가짜 언론이라 규정하고 선거 기간은 물론 임기 내내 언론과 대립했던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연상됐다. 이 여파로 박성제는 사장 연임에 실패했고 MBC는 다시 모진 시련을 겪을 상황에 처해있다.
책을 통해 공영방송으로 소임과 책무를 다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비판성 있고 정론적인 보도를 견지하는 게 왜 어려운지, 무너진 방송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선 어떤 노력을 해야 했는지 두루 알 수 있었다. “국민의 눈높이를 못따라가는 언론은 살아남을 수 없다”라는 저자의 생각이 괜히 나온 건 아닐 터이다. MBC가 계속 MBC로 남길, 남아주길, 남을 수 있길 바랄밖에.
*. 창비 출판사에서 모집한 신간 서평단에 선정되어 이 책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