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6p.
...개인 간 수평적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공공성은 불투명하지만 숨이 통한다. 반면 하나의 통일된 제3자를 통해 구축된 공공성은 추상적이면서도 투명하다. 이 제3자는 역사 시기마다 다양한 형태와 효과로 나타난다. 예컨대 고도로 종교화된 사회에서는 제3자가 신일 수 있으며, 모든 개인은 신에게 충성하고 책임을 진다. 이 제3자는 화폐일 수도 있다. 짐멜이 분석한 것처럼, 화폐는 모든 것을 정량화하고 모든 사람이 통일된 합리성에 따라 계산하고 예측하도록 만든다. 또한 이 제3자는 상품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명확히 밝혔듯이, 상품 생산과 거래의 논리는 다양한 사회적 차이를 제거하고, 거의 모든 사회적 관계를 상품의 속성에 종속시킨다. 이 제3자는 정치적 권위일 수도 있다. 벤담이 설계한 원형 감옥은 고도로 투명하다. 모든 죄수는 감옥 중앙의 감시탑에 있는 병사를 핵심 기준점, 즉 만능에 가까운 유일한 제3자로 삼고, 죄수끼리는 소통하지 않는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부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개인의 모든 활동은 오로지 전체의 발전을 위해 존재하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사생활도, 실질적 차이나 실질적 연결도 없다. 그렇게 모든 것이 완전히 투명해진다. - P-1

34~35p.
..지방의 개천용의 낯섦은 사회생활의 ‘투명하지만 숨 막히는‘ 특성을 반영한다. 그들 삶의 투명성은 성장 과정과 성적이 체제가 정한 기준과 기대에 부합함으로써 의문의 여지 없이 인정받은 데서 드러난다. 반면 그들이 느끼는 숨 막힘은 개인의 고뇌, 망설임, 괴로움을 여유 있게 드러낼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인정‘을 받았지만, ‘관심‘이 부족했다. 인정은 시스템이 정해진 기준에 따라 한 사람의 성과를 평가하고 보상이나 처벌을 결정하는 것이다. 관심은 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이해하는 것이며,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감정, 고민, 갈등, 그리고 역사를 발견하는 행위다. 이는 시험이나 판단, 보상과 처벌을 수반하지 않는다. - P-1

38p.
...모두가 비슷하다는 인식은 호기심을 잃게 하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흥미마저 사라지게 한다. 모두가 같다는 것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비슷하다는 의미이며 언제든 경쟁과 갈등이 일어날 수 있음을 뜻한다. 모두가 너무 닮았기에 상대를 파헤치려 하면 자신의 상처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모두가 똑같기 때문에 상대방의 고생을 특별히 동정할 가치가 없고, 상대방의 성공도 특별히 축하할 가치가 없으며, 일에 대한 열정도 의심스러울 뿐이다.... - P-1

44p.
..안생식 사고는 개방적이고 끊임없이 다양한 경험과 생각 사이를 오가며 스스로를 교정하도록 한다. 이러한 사고의 목적은 결론을 도출하는 데 있지 않고, 심지어 명확한 방향조차 없다. 그러나 그 단계마다 경험에 더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생각을 현실에 더 가깝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 사고 과정은 물속을 헤엄치거나 숲속을 거니는 것과 같아, 감정적·신체적 공명을 일으킨다. 마치 홀륭한 예술과 철학 작품처럼 사고를 경험 속에 뿌리내리게 하고, 경험을 사고 속에서 자라게 하며, 우리를 우리 환경 속에 깊이 자리 잡게 한다. 사고와 경험은 덩굴처럼 얽혀 우리 몸을 단단히 감싼다. 하지만 안생식 사고는 개인이 일방적으로 환경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보수와 진취를 결합해야 한다. 보수는 현실 조건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형성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자신만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진취란 이를 바탕으로 현 상태를 다양한 각도에서 새롭게 이해하고, 기존 조건을 충분히 창의적으로 활용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심지어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도전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진취적 면모가 없다면 그것은 사고가 아니다. ‘비사고‘ 혹은 ‘사고 거부‘의 평온한 나날과 ‘소확행‘은 오늘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 P-1

58p.
..하지만 샤오둥의 그림은 제게 큰 감동을 줍니다. 그가 말하거나 쓰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가 쓰는 글은 모두 매우 직설적이며, 직접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감정조차 서정적이지 않은데, 제가 이해하는 서정적이라 함은 감정을 비교적 응고시킨 뒤 다시 펼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러지 않고 감정과 행동을 함께 드러냅니다. 그의 기록은 매우 직설적이지만 저는 그의 한 글자, 한 문장마다 무게와 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그에게 물어야 합니다. - P-1

69~70p.
..확장해서 말하면, 지금 우리 삶은 너무 편리한데 이 편리함은 성실함을 없애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편리하면 다양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그게 지나치면 야만으로 이어집니다. 모든 것이 교류 없이, 스스로를 교정하지 않아도 이루어진다면, 그게 바로 야만이 되는 거죠. - P-1

74p.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먼저 아주 구체적인 사람을 보고, 그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다음 분류적 사고방식을 통해 지도를 도구 삼아 그에게 좌표를 부여하되,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하는 겁니다. 이 감정은 어느 정도 개인의 생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고, 어느 정도는 일반적인 상황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표준화된 분류 방법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분류 자체는 각자 스스로가 생활을 관찰하면서 얻은 이해에서 나와야 합니다. - P-1

82p.
...사고를 거치지 않은 생활은 살 만한 가치가 없고, 사고에 지나치게 몰두한 생활은 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변증법적 관계입니다. - P-1

137p.
...우리는 자주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고, 음악을 듣지만 사실 그것들도 직접적인 의미가 있진 않잖아요. 주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일종의 작은 소설을 듣는 것과 같고, 한 사람의 작은 이야기를 듣는 것과 비슷합니다. 기능과 의미를 따지자면, 그런 인생의 경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P-1

140~141p.
...일부 학자는 두려움이 일종의 멤버십처럼 작동한다고 봅니다. 특정 사회 계층에 도달하거나 그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만이 두려움을 표현할 자격을 가지며, 그 계층의 구성원들은 서로 두려움을 공유하고 전달하면서 특정 두려움의 표현을 반복적으로 강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실현한다고 말합니다. 앞서 언급한 중산층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범죄에 대한 걱정을 계속해서 표현함으로써 단지 출입 통제를 강화하고, 보안 요원 수를 늘리는 등의 조치를 끌어냅니다. 결국 이는 자신의 신체와 재산상의 안전 및 부동산 가치 보호라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이 됩니다. 반면 하층 사람들은 대개 두려움을 표현할 자격이 없거나, 설사 두려움을 표현하더라도 그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습니다. - P-1

179p.
...즉 그들에게 다큐멘터리나 긴 영상은 별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각자 더 긴박한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처지가 다르니까요. 예를 들어 저는 뤄푸싱이 라이브 방송을 하는 것을 크게 지지했습니다. 그에게 우리와 함께 배우거나, 예술가가 되거나, 다큐멘터리를 만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과제가 있고, 자기만의 긴박감이 있는 거예요. - P-1

186p.
..충칭에 돌아가 보니, 투완土灣 방직 노동자 구역에 많은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우리 친척 한 집도 대여섯 식구가 한 공장에서 동시에 실직했죠. 이 일은 제게 큰 충격이었고, 제 지식과 현실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줬습니다.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고, 제 직접 경험과 지식 사이에 단절이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제 지식으로는 이 일을 설명할 수 없었기에 반드시 알아야겠다 싶었죠. 나중에 깨달은 것은, 지식 생산은 이미 있는 지식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단절 지점에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 가서 판단하고 느끼고자 했습니다. - P-1

187p.
...많은 젊은 친구가, 저 자신을 포함해서, 흔히 겪는 큰 문제 중 하나는 이 단절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이 몇 마디 말이나 이른바 이론으로 가득 차 있어 직접 경험이 충격을 주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직접 경험이 자신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계관이 조금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눈으로 본 것을 빠르게 기존 인식에 맞게 길들입니다. 이 일은 매우 쉽게 일어납니다. 모든 강력하고 주류적인 지식과 담론이 계속 힘을 발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있는 담론 체계로 우리는 쉽게 삶이 평온하다고 느끼니까요.... - P-1

196p.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분석하지 않고,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보지 않는 것입니다. 생활의 가장 큰 의미는 대부분의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간다는 데 있습니다. 의미는 오랜 시간의 축적을 통해, 여러 원인을 거쳐 마침내 나타난 결과에서 드러납니다. 그 결과를 우리는 의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의미를 부여하면 그에 대한 이해를 방해합니다. - P-1

200p.
...직관적 판단은 많이 보고 경험하면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을 많이 보고,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하며, 분석을 줄이고 서술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야 사물을 명확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좋은 지식은 결국 글로 표현될 때는 서술이 되고, 영상으로 표현될 때는 기록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P-1

235p.
...사람의 노동은 매우 중요하며, 전체 수도, 전기, 하수도 시스템의 작동을 유지하게 합니다. 그러나 도시의 이런 중요한 인공물의 기능을 오늘날 흔히 쓰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접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접히면 매우 중요한 사람들의 존재와 노동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설계가 잘된 건물일수록 접힘이 강합니다. 왜냐하면 복잡하고 지저분한 것이 보이지 않고, 모든 게 자연스러우며 깨끗한 듯하기 때문입니다. 자연 화원은 이 접힘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펼침‘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등나무나 대나무처럼 계속 자라고 펼쳐집니다. 펼쳐지는 과정에서 꽃의 힘이 매일 바닥을 청소하는 노동만큼 강하진 않을 수 있지만, 성장하면서 자신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접힘은 사람의 노동 흔적을 없애고 결과만 보이게 하며, 노동 과정은 숨겨집니다. 반면 화원을 만들면 자신이 펼쳐가는 과정을 볼 수 있죠. 꽃은 내일 바로 피지 않을 수도 있고, 반드시 피는 것도 아니며, 죽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과정 자체는 존재합니다. 사람의 주의력은 접힌 상태와 펼쳐진 상태에서 다르게 나타납니다. - P-1

251p.
..많은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구매형 노동 분업 제도 아래에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노력을 볼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노력도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아예 보고 싶어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부근‘은 매우 흐릿해집니다. 때로 이런 흐릿함은 일종의 심리적 자기방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면이 접히는 과정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데, 그 접힘을 펼쳐보면 아프고 번거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차라리 보지 않기를 선택합니다. - P-1

271p.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사육사가 동물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단계 중 하나는 개체화입니다. 그가 느끼는 진정한 감정과 상호작용은 한 종 전체가 아니라, 반드시 특정 개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사육사가 한 무리의 코뿔새를 구별하는 능력은 그저 오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결과가 아닙니다. 이는 적극적인 개체화의 추구일 수 있으며, 개체를 인식하고 감정을 느끼는 과정에서 더 깊이 몰입하게 됩니다. 개체화가 없으면 집단 전체와 정서적 관계를 형성할 수 없지요. - P-1

316p.
..사람들은 먼 곳에 있는, 익명인 완전한 낯선 사람에게는 기꺼이 털어놓습니다. ‘털어놓음‘은 극적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상대방은 당신의 상황이 어떤지, 사건의 전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그 순간의 고립된 감정만 봅니다. 분노, 수치, 또는 믿기 어려움과 같은 감정이요. 이런 감정은 확대되어 사건 전체가 매우 극적으로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과의 교류는 다릅니다. 같은 방식으로 사건을 이야기하면 주변 사람은 지루해할 수도 있고, 사건이 그리 극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당신도 당시 잘못한 부분이 있을 거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과 깊이 있는 교류를 하려면 이야기를 더 세밀하게 하고, 반성적이어야 합니다. - P-1

324p.
..오늘날에는 많은 일이 단기적인 유효성을 추구하고, 의미를 겉으로 드러내야 하며,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의미를 아주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말로 먼저 의미를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일도 있다고 보는데, 그럴 때는 일단 실행하고 많은 사람이 공감하면 그것은 지속된다고 봅니다. 이런 일은 생활 속의 희망을 느끼게 하고 조용하지만 꾸준히 이어지는 지속 가능한 무언가가 있음을 체감하게 합니다. 이것이 제가 느낀 매우 직관적인 감각입니다. - P-1

338~339p.
..이 얘기는 허황되거나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사회의 혁명적 변화는 종종 특정 감각이나 감정이 정당화될 때 일어나곤 합니다. 지금 우리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200년 전과 완전히 다릅니다. 아이들은 기분이 좋지 않으면 떼를 씁니다. 오늘날 아이의 ‘떼‘는 아주 강한 정당성을 가지며, 어른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과거에는 어땠죠? 아이의 ‘떼‘는 관리 대상이고, 이 아이를 ‘착하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과거와 달리 아이의 역할이 달라진 덕분에 아동심리학이나 아동교육학 같은 학문이 생겨난 것이죠. 이는 곧 우리가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금 노인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사회에서 노인은 권위를 가진 존재였지만 그 권위 때문에 노인의 내면, 욕망, 감정 등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질서와 존엄, 지혜, 나아가 사회 전체를 대표해 우리를 통제하는 상징이었죠. 하지만 이제 우리는 노인도 연약하며 다양한 감정과 요구를 가진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아직은 진행형이지만 이제 우리는 점차 노인의 감정에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노인의 감정과 인식의 정당성이 널리 인정받게 된 것은 사회 변화 과정에서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사실 모두가 예전보다 더 ‘유리 멘탈‘이 된 셈입니다. ‘유리 멘탈‘이 쉽게 상처받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상처받는 이유를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마주하고 분석할지 아는 것은, 적어도 우리를 성찰하게 만드는 매우 직접적인 원동력이 됩니다. - P-1

344p.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하나의 경향을 보는 것 같습니다. 본래 관계적이고 공명적이었던 특성이 점점 더 개인적이고 내적인 특성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인식할 때 매력 같은 자극적 특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품성으로 판단합니다. 이 사람은 뛰어난가, 이 사람은 성실한가처럼요. 만약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의 생각을 반영한다면, 우리는 매력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매력이 있는 것인가"라는 인식 방식 자체도 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1

394p.
...그렇다면 ‘쿨함‘이란 무엇인가? 쿨함은 결단할 용기와 자신만의 독특한 결단을 갖는 것입니다. 류샤오둥은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이 한 사람에 대해 내리는 판단을 바꿔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바꾸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의 이런 결단은 충동적 반응이 아니라 경험의 축적에 기반한 것입니다. 그는 특히 눈이나 얼굴이 아닌 몸을 보고, 근육과 자세를 관찰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몸은 거짓말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가 보려는 것은 오랜 생활의 경험 속에서 형성된 몸입니다. ‘쿨함‘은 우회하지 않고, 꾸미지 않으며, 가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류샤오둥의 표현을 빌리면 ‘간사하지 않고‘ ‘성실한‘ 것입니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특히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을 그릴 때 반복해서 그리고 다시 고칩니다. 자신의 그림이 실물과 닮지 않으면 허용하지 않습니다. 닮지 않았다는 것은 곧 충실하지 않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의 예술적 방법과 관찰 방식은 곧 그 사람의 성격이 됩니다.
..그는 ‘견식見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견식 없는 쿨함은 바보짓이다. 따라서 그는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하며, 상대방의 오랜 생활의 경험을 세심히 살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힘 있는 직접성은 역사적 맥락과 현장 상황에 대한 관찰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역사와 현장에 대한 감각이 곧 그가 말하는 ‘견식‘을 구성합니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29p.
..그러나 영어반 시절에서 가장 많이 떠올리는 장면은 역시 유인물을 넘겨주며 내게 상냥하게 말을 건네던, 전교 학생회장의 ‘부드러운 적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 적대를, 다정함보다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 - P-1

31p.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좋은 곳에 온 사람들끼리 환대하는 것은 쉽다. 원치 않았지만 오게 된 곳, 막막하고 두려운 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보내는 환대야말로 값진 것이다. - P-1

31~32p.
..그런데 로봇 3원칙은 열여섯 살의 나에게 왜 그렇게도 인상적이었을까. 저 3원칙에 ‘로봇‘ 대신 ‘아이‘를, ‘인간‘ 자리에 ‘부모‘를 넣어보니 이해가 되었다. 한창 사춘기였던 그 시절의 나는, 부모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부모의 지시를 따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에 의해 창조되었고 부모의 통제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나와 로봇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 P-1

63p.
...잡초가 이름을 모르는 식물을 의미하듯 잡귀는 이름이 잊힌 귀신이다. 잡귀가 아닌 귀신은 그 이름을 불러줄 누군가가 있다. 이름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불러 초대하면서 제사가 시작된다. - P-1

72p.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새해에 세운 그 거창한 계획들을 완수하기에 열두 달은 너무 짧다. 그러나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 해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 P-1

77p.
..‘테세우스의 배‘는 조금씩 변했지만, 법과 권위, 대중의 동의가 그 배가 테세우스의 배임을 인증해주었기에 계속 테세우스의 배로 남을 수 있었다. 인간은 평생에 걸쳐 테세우스의 배보다도 더 큰 변화를 겪는다. 이십대의 나는 길에서 마주쳐도 지금의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나 역시 십대의 나를 그냥 지나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사람이 과거의 그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애써 믿으며 살아간다. 변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애써 찾아내, 사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 P-1

80p.
...모든 지도에 축척이 있듯이 실제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를 초과한다. 다만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뿐. - P-1

102p.
..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를 알기 위해 애썼던 십대의 내가 거기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 P-1

113p.
...순교자와 양심수들에게 세이프워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배교‘와 ‘전향‘이면 고문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안전어를 쓰지 않았다. 원하면 내려올 수 있는 러닝머신과 처벌 기계로서의 트레드밀. 아예 안전어가 없는 무의미한 시련과 있어도 내뱉지 않고 감내하는 극한의 고통. 그것은 그저 의미의 있고 없음의 차이일까? 만약 그렇다면 언젠가 ‘잘 통제된 고통‘이 아닌, 그야말로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끝 모를 고통에 직면할 때, 나는 무엇으로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고통이 닥치지도 않았는데 앞질러 두려워하는, 아니 혐오하는 이런 증상은 전세계적 현상이 되어 있다. - P-1

135p.
...내가 어딘가 잘못된 곳에 와 있고,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다시 ‘이탈‘해야만 할 것 같은 이 익숙한 충동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 P-1

137p.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 P-1

143p.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 P-1

169p.
..지금은 고전이 된 두 편의 논문에서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 (1979)과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 (1981)는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것이 일종의 운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른바 ‘도덕적 운moral luck‘이다. 이들은 도덕적 평가는 운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과 무관해야 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반박한다. 거칠게 말해 1930년대 독일에 살게 된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치의 악행을 방관하거나 그에 가담하게 되는데, 이는 도덕이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다른 사람에게 베풀 게 많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고귀한 행위를 하기가 쉽다. 이런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P-1

192~193p.
...내 삶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무한한 삶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이 삶의 값은 0이며(1/∞=0) 아무 무게도 지니지 않을 것이니, 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는 단 한 번의 삶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태어나지 않은 것을 몰랐기에 전혀 애통하지 않았다. 죽음 이후에도 내가 죽었음을 모를 것이고, 저 우주의 다른 시공간 어디엔가는 내가 존재했는지도 모르는 내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위안이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25p.
..인생의 외지인. 그런 말이 머리에 떠오른다. 별로 인생을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남의 힘을 빌려서 무언가를 이루려 하고, 흘러가는 대로 떠내려가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 있다. 인생을 스스로 선택한다거나 자기 힘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 P-1

60p.
..태어난 지 반세기나 지나면 대부분의 감정은 너무 익숙해져서 이골이 나 있고, 대개는 상상이 간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공포는 만날 때마다 신선한 감정이다.
..언제 먹어도 설레게 되는 카레처럼. - P-1

197p.
.."당고자카도 구불구불해서 도중에 커브가 많아. 꽤 가파른 언덕이야. 비탈길에서 커브가 나오면 누구라도 속도를 줄이잖아. 그때 무언가가 조금씩 떨어져서 길모퉁이에 쌓이는 건 아닐까?"
.."뭐가 쌓여?"
.."뭐가 쌓이냐고? 그야 뭐 근심 걱정이라든가, 음(陰)의 에너지라든가……." - P-1

319p.
..그래. 이 작은 커피잔 속 어둠에 비친 내 얼굴만이 현실이다. 이렇게 괴담에 몸서리를 치고, 내가 안전지대에 있다는 것을 절실히 확인하는 이 순간만이 현실이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15p.
..책이나 기사 등 문자로 이루어진 세상을 보다 보면 먼지와 진액이 가득한 실물 세상이 하찮고 엉성하고 지저분해 보일 때가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도 책을 읽는 독자 제위들은 더욱 예민하실 테니 더더욱 그리 느끼시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며 그 모두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겨울에 입는 니트 하나에도 국제 정세가 얽혀 있다. 집 앞에서 파는 볼펜에도 글로벌 산업의 고민과 한계가 들어 있다. 이른바 어른이 되는 건 그 복잡한 체계를 이해하며 그 일부가 되는 것이다. - P-1

36p.
..동시에 모든 그럴싸한 게 기호화되고 모든 기호가 상품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브랜드의 기능은 조금 다르다. 현대 사회에서 브랜드는 높은 부가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높은 부가가치를 위해 ‘브랜드라는 기호‘ 자체와 관련된 여러 모호한 마케팅을 실시한다. 그러면 브랜드 제품에 비싼 값을 줘야 하는 이유가 성립된다. 소비자가 그 이유를 납득해 비싼 값을 주고 브랜드 제품을 산다면 결국 소비자는 스스로 홀린 셈이다. 사회는 원래 비정하다. - P-1

60p.
..그런 기호가 맞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런 기호가 자기에게 있다는 게 중요하다. 미분된 작은 개인적 기호들이 적분되어 내 삶의 모양이 만들어진다. 내 삶의 모양이나 기호가 뭐가 중요하냐 싶을 수도 있고, 그건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호 없는 삶을 살다 보면 종종 스스로의 삶이 투명 인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중의 허무를 피하기 위해 지금 틈틈이 과하지 않은 정도의 기호를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기호가 과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허무하다. - P-1

95p.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예민하고 인습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때문에 굳이 몸에 걸칠 다른 걸 보급시키기는 상당히 어렵다.... - P-1

117p.
..거듭 말하지만 청바지의 가장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이 옷에 갖는 인식이다. 보통 의류 소재 섬유가 찢어지면 사람들은 그 옷을 수선하거나 버려야겠다고 여긴다. 청바지의 원료인 데님은 그렇지 않다. 데님은 구멍이 나고 색이 바래도 멋있는 옷으로 인정받는다. 찢어진 울이나 찢어진 나일론, 찢어진 고어텍스는 하자일 뿐이다. 유독 데님만 불량이 양품이 되고 해진 것이 멋의 요소가 된다. 내 습관과 체형을 담은 옷은 기분에 따라 내 삶의 궤적을 새겨 둔 태피스트리가 되기도 한다. - P-1

124p.
...내가 원했던 건 말하자면 두루 수준 높은 물건이었다. 적당한 소재. 적당한 디자인. 그러면서도 나름의 정통성이나 맥락이 있는 것. 뭔가를 얄팍하게 따라 하지 않는 것(깊이 있게 따라 한다면 그건 이미 따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아주 수준 높은 모방에는 창작에 버금가는 오라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쓰는 물건이니까 튼튼한 것, 몸에도 편한 것.... - P-1

125p.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정통성도 중요했다. 여기에서의 정통성은 원조라기보다는 자신이 무엇의 영향을 받고 모사했는지에 대해 밝히는 투명성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모조품이 있고, 그중에는 사람들에게 가짜라는 인지도 없이 그냥 출시되어 팔리는 물건이 많다. 나는 그런 물건을 나도 모르게 집에 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