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p.
..책이나 기사 등 문자로 이루어진 세상을 보다 보면 먼지와 진액이 가득한 실물 세상이 하찮고 엉성하고 지저분해 보일 때가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도 책을 읽는 독자 제위들은 더욱 예민하실 테니 더더욱 그리 느끼시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며 그 모두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겨울에 입는 니트 하나에도 국제 정세가 얽혀 있다. 집 앞에서 파는 볼펜에도 글로벌 산업의 고민과 한계가 들어 있다. 이른바 어른이 되는 건 그 복잡한 체계를 이해하며 그 일부가 되는 것이다. - P-1

36p.
..동시에 모든 그럴싸한 게 기호화되고 모든 기호가 상품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브랜드의 기능은 조금 다르다. 현대 사회에서 브랜드는 높은 부가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높은 부가가치를 위해 ‘브랜드라는 기호‘ 자체와 관련된 여러 모호한 마케팅을 실시한다. 그러면 브랜드 제품에 비싼 값을 줘야 하는 이유가 성립된다. 소비자가 그 이유를 납득해 비싼 값을 주고 브랜드 제품을 산다면 결국 소비자는 스스로 홀린 셈이다. 사회는 원래 비정하다. - P-1

60p.
..그런 기호가 맞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런 기호가 자기에게 있다는 게 중요하다. 미분된 작은 개인적 기호들이 적분되어 내 삶의 모양이 만들어진다. 내 삶의 모양이나 기호가 뭐가 중요하냐 싶을 수도 있고, 그건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호 없는 삶을 살다 보면 종종 스스로의 삶이 투명 인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중의 허무를 피하기 위해 지금 틈틈이 과하지 않은 정도의 기호를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기호가 과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허무하다. - P-1

95p.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예민하고 인습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때문에 굳이 몸에 걸칠 다른 걸 보급시키기는 상당히 어렵다.... - P-1

117p.
..거듭 말하지만 청바지의 가장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이 옷에 갖는 인식이다. 보통 의류 소재 섬유가 찢어지면 사람들은 그 옷을 수선하거나 버려야겠다고 여긴다. 청바지의 원료인 데님은 그렇지 않다. 데님은 구멍이 나고 색이 바래도 멋있는 옷으로 인정받는다. 찢어진 울이나 찢어진 나일론, 찢어진 고어텍스는 하자일 뿐이다. 유독 데님만 불량이 양품이 되고 해진 것이 멋의 요소가 된다. 내 습관과 체형을 담은 옷은 기분에 따라 내 삶의 궤적을 새겨 둔 태피스트리가 되기도 한다. - P-1

124p.
...내가 원했던 건 말하자면 두루 수준 높은 물건이었다. 적당한 소재. 적당한 디자인. 그러면서도 나름의 정통성이나 맥락이 있는 것. 뭔가를 얄팍하게 따라 하지 않는 것(깊이 있게 따라 한다면 그건 이미 따라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아주 수준 높은 모방에는 창작에 버금가는 오라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쓰는 물건이니까 튼튼한 것, 몸에도 편한 것.... - P-1

125p.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정통성도 중요했다. 여기에서의 정통성은 원조라기보다는 자신이 무엇의 영향을 받고 모사했는지에 대해 밝히는 투명성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모조품이 있고, 그중에는 사람들에게 가짜라는 인지도 없이 그냥 출시되어 팔리는 물건이 많다. 나는 그런 물건을 나도 모르게 집에 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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