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미에서는 그랬지. 나는 고독했어. 외톨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척 고독했어. 왜냐하면 내가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었어. 그래서 그때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나는 시간의 흐름이 없는 장소로 들어가고 싶었던 거야." - P-1

..나는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가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강에 대해 생각하고, 조수에 대해 생각한다. 숲에 대해 생각하고, 용솟음치는 물에 대해 생각한다. 비에 대해 생각하고, 벼락에 대해 생각한다. 바위에 대해 생각하고 그림자에 대해 생각한다. 그것들은 모두 내 안에 있다. - P-1

.."자네도 참 답답한 인간이군. 계시란 그런 거란 말일세" 하고 샌더스는 혀를 차면서 말했다. "계시란 일상성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거야. 계시 없는 인생이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다만 관찰하는 이성에서 행동하는 이성으로 뛰어 옮겨 가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나, 이 얼간이 같은 친구야?" - P-1

.."누구나 사랑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결여된 일부를 찾고 있는 법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언제나 서글픈 기분이 드는 거야. 아주 먼 옛날에 상실한 그리운 방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기분이 되는 거지. 당연한 일이야. 그런 기분은 네가 발명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특허 신청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P-1

...그녀는 시동을 걸었다가 멈추고, 무언가 생각하듯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시동을 걸고 주차장에서 빠져나간다. 시동을 멈췄다가 다시 걸 때까지의 공백이 너를 몹시 슬프게 만든다. 그 공백이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안개처럼 네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오랫동안 그것은 네 마음에 머물러 있다. 이윽고 너의 일부가 된다. - P-1

"..나는 말한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제가 추구하는 강함은,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강함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치기 위한 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 거기에 견뎌 내기 위한 강함입니다. 불공평함이나 불운, 슬픔이나 오해, 몰이해— 그런 것에 조용히 견뎌 나가기 위한 강함입니다." - P-1

.."미궁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만들어 낸 것은, 지금 알려져 있기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사람들이야. 그들은 동물의 창자를—때로는 인간의 창자를—꺼내서 그 형태로 운명을 점쳤어. 그리고 그 복잡한 형태를 찬양했어. 그러니까 미궁의 기본 형태는 창자야. 즉 미궁의 원리는 너 자신의 내부에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건 네 바깥쪽에 있는 미궁의 성격과도 서로 통하고 있어."
.."메타포?"
.."그렇지. 상호 메타포. 네 외부에 있는 것은 네 내부에 있는 것이 투영된 것이고, 네 내부에 있는 것은 네 외부에 있는 것의 투영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야. 그래서 넌 종종 네 외부에 있는 미궁에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너 자신의 내부에 세팅된 미궁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거지. 그건 대개 굉장히 위험한 일이야." - P-1

..일주일 전이었다면 난 이런 음악을 들어도 단 한 음정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야,라고 청년은 생각했다. 이해하려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어느 조그만 찻집에 들어가,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됐고, 덕분에 이 음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것은 그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사건처럼 생각됐다. - P-1

.."돌님과 이야기하는 데 음악이 방해되지는 않아?" 하고 청년은 나카타 씨에게 말을 걸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음악은 나카타에게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음악은 나카타에겐 바람과 같은 것이니까요." - P-1

..오시마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이죠" 하고 대답했다. "그런 일은 있습니다. 무언가를 경험하고, 그것에 의해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가 일어납니다. 화학작용 같은 것이죠. 그리고 그후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거기에 있는 모든 눈금이 한 단계 위로 올라간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세계가 한 단계 더 넓어졌다는 것을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드물기는 합니다만, 가끔 있습니다. 연애와 마찬가지입니다." - P-1

..나는 숲의 한가운데에 발을 들여놓는다. 나는 속이 텅 빈 인간이다. 나는 실체를 잡아먹는 공백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두려워해야 할 것은 없다. 아무것도 없다. - P-1

.."아저씨, 이제는 아무도 원고를 읽을 수 없게 됐어" 하고 호시노 씨는 말했다. "무엇이 쓰여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전부 깨끗하게 사라졌어. 이 세상에서 형태가 있는 것이 조금 줄고, 그만큼 무無가 불어난 셈이지." - P-1

..나카타 씨는 죽음을 통해 간신히 보통의 나카타 씨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청년은 생각했다. 나카타 씨는 너무 철저하게 나카타 씨로 있었기 때문에 나카타 씨가 보통의 나카타 씨가 되기 위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P-1

.."네가 숲에 있을 때 넌 온전히 숲의 일부가 되고, 네가 빗속에 있을 때 넌 온전히 쏟아지는 비의 일부가 되지. 네가 아침 속에 있을 때 넌 온전히 아침의 일부가 되고, 네가 내 앞에 있을 때 넌 내 일부가 돼. 간단히 말하면 그런 이야기야." - P-1

.."말로 설명해 봤자 그곳에 있는 것을 올바로 전할 수 없기 때문에 말을 못 한다는 것 아닌가요?"
.."그래, 그런 거야" 하고 사다 씨가 말한다. "잘 맞혔어. 말로 설명해도 올바로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예 말하지 않는 게 제일 좋지."
.."가령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럴까요?" 하고 나는 반문한다.
.."그래. 설령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말이야" 하고 사다 씨가 대답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아마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 P-1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소중한 것을 계속 잃고 있어." 전화벨이 그친 다음에 그가 말한다. "소중한 기회와 가능성, 돌이킬 수 없는 감정. 그것이 살아가는 하나의 의미지. 하지만 우리 머릿속에는, 아마 머릿속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기억으로 남겨 두기 위한 작은 방이 있어. 아마 이 도서관의 서가 같은 방일 거야. 그리고 우리는 자기 마음의 정확한 현주소를 알기 위해, 그 방을 위한 검색 카드를 계속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지. 청소를 하거나 환기를 하거나 꽃의 물을 갈아 주거나 하는 일도 해야 하고. 바꿔 말하면 넌 영원히 너 자신의 도서관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거야."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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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은 오랫동안 내린 비로 범람한 큰 강물과 닮았다. 지상의 표지판이나 방향판 같은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그 탁류 속에 모습을 감추고, 이미 어딘가 어두운 장소로 옮겨졌다. 그리고 비는 강 위로 계속 억수같이 퍼붓고 있다. 그런 장마 광경을 뉴스 같은 데서 볼 때마다 너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지, 꼭 그대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라고. - P-1

..지금부터 백 년 뒤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나를 포함해서) 지상에서 사라져, 먼지나 재가 돼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여기 있는 모든 사물이 허무한 환영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바람에 당장이라도 흩날려 없어질 것처럼 보인다. 나는 두 손을 펼치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악착같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 P-1

...그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무명無明의 세계는, 그 무거운 침묵과 혼돈은, 오래된 그리운 친구이자 지금은 자신의 일부이기도 했다. 나카타 씨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세계에는 글씨도 없고, 요일도 없고, 무서운 지사님도 없고, 오페라도 없고, BMW도 없다. 가위도 없고, 길쭉한 모양의 모자도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장어도 없고, 팥빵도 없다. 거기에는 전부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 부분은 없다. 부분이 없으니까 이것과 저것을 바꿀 필요도 없다. 떼어 내거나 덧붙이거나 할 필요도 없다. 어려운 일은 생각하지 않고, 전부의 속으로 몸을 담그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나카타 씨에겐 무엇보다도 고마운 일이었다. - P-1

..정오가 조금 지나자 검은 구름이 갑자기 머리 위를 뒤덮는다. 공기가 신비스러운 색깔로 물들어 간다. 곧이어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통나무집의 지붕과 유리창이 애처로운 비명을 지른다. 나는 즉시 옷을 벗고 알몸이 되어 빗속으로 뛰어든다. 비누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다. 멋진 기분이다. 나는 큰 소리로 의미도 없는 말을 외쳐 본다. 크고 단단한 빗방울이 작은 돌멩이처럼 온몸을 때린다. 온몸에 따끔하게 느껴지는 통증은 종교적인 의식의 일부 같다. 그것은 내 뺨을 때리고, 눈꺼풀을 때리고, 가슴을 때리고, 배를 때리고, 페니스를 때리고, 고환을 때리고, 등을 때리고, 다리를 때리고, 엉덩이를 때린다. 눈을 뜨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아픔에는 분명히 아픔보다는 친밀한 정감이 깃들어 있다. 이 세계에서 내가 한없이 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것이 기쁘다. 갑자기 해방감을 느낀다. 나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흘러 들어오는 물을 마신다. - P-1

.."자네는 이미 자네가 아니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혀 위에서 천천히 음미했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일세, 나카타 씨.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것은 말이야." - P-1

...내가 원하는 만큼 오래오래 여기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다. 읽고 싶은 책은 서가에 얼마든지 꽂혀 있고, 식료품도 충분하다. 그러나 여기가 한때의 통과 지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곳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너무나도 완벽하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그것은 지금의 나는 아직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아직 너무 이르다, 아마도. - P-1

.."이론적으로는 못 할 일도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자연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평온함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위협적인 거야. 그런 배반성을 잘 받아들이려면 나름의 준비와 경험이 필요해. 그러니까 우리는 일단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로 돌아가는 거야. 사회와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곳으로 돌아가는 거야." - P-1

.."다무라 군, 우리 인생에는 되돌아갈 수 없는 한계점이 있어. 그리고 훨씬 적기는 하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한계점도 있지. 그런 한계점에 이르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는 그저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 거야." - P-1

..그는 카운터 위에 놓여 있는 길고 뾰족한 연필을 손에 들고 바라본다. 그 연필은 그의 신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물건처럼 보인다. - P-1

..나카타 씨는 오랫동안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나가노현에도 나카노구에도 바다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카타 씨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바다라는 것을 오랜 기간에 걸쳐 상실해 왔음을 깨달았다.... - P-1

..그녀는 무언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징의 대상은 아마도 언젠가의 시간이며, 어딘가의 장소다. 그리고 또 일종의 마음의 존재 방식이다. 그녀는 그와 같은 행복한 우연의 만남에서 빚어진 요정처럼 보인다. 영원히 상처 입을 리 없는 청순하고 순진무구한 상념이 그녀 주위에 다사로운 봄빛의 포자처럼 떠돌고 있다. 사진 속에서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1969년,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풍경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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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3p.
..그러나 그렇게 설명한들 과연 너는 얼마나 이해해줄 수 있을까? 움직임이 없고 말수 적은 이 도시에서 너는 태어나 자랐다. 간소하고 정밀한, 그리고 완결된 장소다. 전기도 가스도 없고, 시계탑에는 바늘이 없고, 도서관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없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본래의 의미만을 지니고, 모든 것이 각자 고유의 장소에, 혹은 눈길이 닿는 그 주변에 흔들림 없이 머물러 있다. - P-1

186p.
..오래된 꿈—그것은 내 그림자가 추측하듯 긁어내어져 밀폐 보존된 사람들 마음의 잔재일까? 나로서는 그 가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내가 보는 한 눈앞에 있는 건 병조림처럼 가둬진 ‘혼돈의 소우주‘일 뿐이다. 우리의 마음이란 이토록 불명료하고 일관성이 결여된 것인가? 혹은 오래된 꿈이 이처럼 단편적이고 혼란스러운 메시지밖에 내보낼 수 없는 건, 그것이 결속된 하나의 마음이 아니라 ‘남은 부스러기‘를 모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일까? - P-1

336~337p.
..그 정경은 어릴 적 읽었던 그림책의 한 장면 같았다. 무언가가 지금부터 바뀌려 한다—그런 예감이 들었다. 길모퉁이를 돌면 그곳에서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소년 시절 내가 종종 느꼈던 감각이다. 그 무언가는 내게 중요한 사실을 알리고, 그 사실은 또 내게 응분의 변용을 재촉하리라. - P-1

637p.
..카운터 위에 놓인 내 손에 그녀가 손을 포갰다. 매끄러운 다섯 손가락이 내 손가락과 조용히 얽혔다. 종류가 다른 시간이 그곳에서 하나로 포개져 뒤섞였다. 가슴 밑바닥에서 슬픔 비슷한, 그러나 슬픔과는 성분이 다른 감정이 무성한 식물처럼 촉수를 뻗어왔다. 나는 그 감촉을 그립게 생각했다. 내 마음에는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영역이 아직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다. 시간도 손대지 못하는 영역이. - P-1

694p.
..나는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너의 손에 닿는다. 그리고 그 손을 잡는다. 너도 내 손을 잡는다. 우리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나의 젊은 심장이 가슴속에서 메마른 소리를 낸다. 나의 기억이 선명한 예각을 지닌 쐐기가 되고, 나무망치가 그것을 올바른 틈새에 정확히 박아넣는다. - P-1

737~738p.
.."시간이 없으면, 축적이란 개념도 없는 건가?"
.."네, 시간이 없는 곳에는 축적도 없습니다. 축적처럼 보이는 현상은 현재가 던져주는 잠깐의 환영일 뿐이에요. 책장을 한장씩 넘기는 광경을 상상해보세요. 책장이 넘어가는데 쪽 번호는 변하지 않는 겁니다. 뒷장과 앞장이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주위 풍경이 바뀌어도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늘 현재밖에 없다?"
.."그래요. 이 도시에는 현재뿐입니다. 축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덮어쓰이고 갱신됩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입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곱씹는 사이, 촛불이 크게 한 번 흔들리며 이윽고 꺼졌다. 방에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으면서 시간도 사라졌다. - P-1

761p.
..나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 몇 초 동안 수많은 정경이 차례로 뇌리에 떠올랐다. 가지각색의 정경이다. 내가 소중하게 지켜온 모든 정경이다. 그중에는 비가 쏟아지는 드넓은 바다의 광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망설임은 없다. 아마도.
..나는 눈을 감고 몸속의 힘을 한데 모아, 단숨에 촛불을 불어 껐다. - P-1

766~767p. 작가 후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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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p.
...나는 성큼성큼 걸었다. 갑자기 훌쩍 자란 느낌이었다. 내가 하나의 개체가 된 만큼 주변 사물도 하나하나 개체로 보였다. 이제 우리는 같은 눈높이로 마주보았다.... - P-1

39p.
..한번은 내가 버린 스웨터를 입은 남자아이를 본 적이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았다. 낡고 해져 더는 나에게 필요 없는 무언가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물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P-1

80p.
..굵직굵직한 사건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바람에, 기억의 그물코가 점점 좁아져 결국엔 망각의 운명에 빠져야 할 사소한 일들까지 함께 기억되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엔 사소한 일들도 마치 기생충처럼 인상적인 사건들에 깊이 스며들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 P-1

126p.
..바람은 아버지에게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람 중에는 스웨덴 바람, 영국 바람, 러시아 바람, 그리고 희귀한 사막 바람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바람의 세기였다. 바람이 강할수록 바다를 지나온 시간은 짧았다. 아버지가 다시 방에 들어와 내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면 우리는 방금 전 집 밖의 키 큰 피나무에서 소리를 낸 돌풍의 이동 시간을 계산했다. 폭풍이 불면 바람이 해안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데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 공기에서 소금 냄새가 났고, 피나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 P-1

134p.
...나는 누워 비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방문도 완전히 닫는 법이 없었고, 복도 조명도 계속 켜져 있어야 했다. 길쭉한 빛줄기가 정확히 내 침대 끝을 지나갔다. 나는 빛줄기 속으로 발을 넣었다. 내 몸의 어딘가는 환한 세계에 남아 있어야 했다. 맨발은 깨어 있고 나를 보호해야 했다. 복도의 조명, 살짝 열린 문틈, 빛의 절단면, 다림질하는 어머니, 새로 깐 침대 시트, 비스듬히 열린 창문, 환자들의 지옥 같은 연주로 가득 찬 저녁의 온화함. 이 모든 게 완벽했다.... - P-1

138~139p.
..당시 내가 했던 대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내 대답을 좋아해서 자주 반복했기 때문이다.
.."신발이 너무 잘 맞으면 신발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려요.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면 아빠는 그걸 신고 있다고 항상 떠올리고 싶어 해요. 발이 조이는 신발을 신으면 그걸 신고 있다는 걸 잊을 수가 없어요."
.."오, 영리한 대답이다! 내 생각도 그래. 편안함과 망각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 P-1

192~193p.
...사실 선물이라는 건 그렇게 다루어달라고, 그렇게 파괴해달라고 외치기 마련이다. 만일 내가 잘 부서지는 선물, 예를 들어 완벽하게 깎아놓은 색연필 상자를 받아들면 뭔가 알 수 없는 전율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선물의 원래 성질을 통해 증폭된 일종의 과민 상태였다. 나는 색연필을 받은 것이 기뻤지만 동시에 연필을 부러뜨리는 상상을 했다. 연분홍색부터 검은색까지 서른여섯 자루 모두를. 그렇다면 가족 행사에서 무언가를 망가뜨리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내게 큰 성취였고, 선물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나만의 경건한 헌신이었다. - P-1

261~262p.
...이상하게도 나는 분노 발작 때와 마찬가지로 기쁨의 눈물에도 적절한 대처 방법을 찾지 못했다. 무언가 나를 화나게 해서 미쳐 날뛰면 그건 항상 분노 유발자에 대한 단순한 반응 이상이었다. 분노는 원인을 넘어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갔다. 이 상태에 빠지면 나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소멸시키고 싶었고, 룸펠슈틸츠헨처럼 나 자신을 두 동강 내버리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평화롭게 연기를 내뿜는 숯가마를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행복함과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며 하염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모든 것에 눈물이 터졌고, 내 마음속 깊이 자리한 고통을 울음으로 쏟아냈다.... - P-1

295p.
...지금 돌아보니 어쩌면 우리 가족도 아버지에게는 항상 하나의 관념이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정신병원장으로서의 삶과 요트 선장으로서의 삶, 자급자족하는 농부로서의 삶은 물론이고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의 삶, 그리고 우리 가족조차 아버지가 안락의자에 앉아 책에 몰두하거나 우리와 멀리 떨어져서 만들어낸 하나의 이론일 수 있었다. - P-1

362~363p.
.."네가 하는 일 중에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있고, 내가 하는 일 중에도 너와 상관없는 일이 있어."
..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계속 책을 읽었다.
..나는 몇 달 동안 이 말을 마음의 상처로 안고 다녔는데, 나중에야 아버지의 그 말이 내게도 도움이 되는 큰 자유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1

478~479p.
..점점 더 그런 느낌이 든다. 과거란 사실 미래보다 훨씬 더 불확실하고 확정되지 않은 곳이 아닐까 하고. 흔히 우리는 내 뒤에 놓인 것이야말로 확정된 것이자 완료된 것이자, 이야기되기만 기다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것은 이른바 아직 만들어가야 할 미래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만일 과거 또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면? 철저히 파고들어 재구성한 과거로부터만 열린 미래 같은 것이 생겨난다면? 이런 생각이 나를 짓누른다. 그럼에도 가끔은 아직 내 앞에 놓인 삶이 내게 맞게 재단된, 피할 수 없이 끝까지 걸어가야 할 구간처럼 느껴진다. 끝까지 조심조심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야 할 하나의 선처럼.
..그래, 나는 이제 믿는다. 내가 기억의 꾸러미를 다시 하나하나 풀어 꺼내놓을 때, 겉으로 확실해 보이는 과거에 대한 믿음을 접고 과거를 혼돈으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하고 꾸미고 기념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나의 죽은 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 친숙하면서도 내가 지금껏 인정한 것보다 더 낯설고 자율적인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현재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미래는 그 영원한 약속을 이행하고 불확실해지고, 하나의 선이 하나의 면으로 넓어질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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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p. «최애의 아이»
...그러나 우미의 지론에 따르면 애초에 젊음이란 해지기 위해 발명된 것이므로 젊은 아도니스에게 어울리는 건 명품이 아닌 싸구려 천이었다. 만약 우미가 유리의 사진을 찍었다면 폐공장을 섭외하고 청바지를 입혔을 거다. 입안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페인트 사탕을 빨아 파랗게 물든 혓바닥, 아무하고나 주고받는, 고양이 같은 혓바닥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더러운 매트리스에 깔린 보푸라기 인 담요 위에서 까슬까슬한 음모를 내보일 것이다. 젊음은 거기 존재하니까.... - P-1

111p. «마유미»
.."남자들도 그런 거겠지? 내가 남자가 된다고 상상하면 곧장 수컷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겠지? 간장 같은 여자가 진짜 여자라는 걸 말야."
.."글쎄."
.."그런 남자들도 나를 보면 역겨운 마음이 들까? 내가 남자 아닌 남자들이 역겹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 P-1

216~217p. «해변 지도로부터의 탈출»
...푸른 어둠 속을 걸으며 미도는 가장 넓은 땅을 가진 독재자도 그가 가진 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다리에 느껴지는 피로가 어제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걸은 탓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난 일은 전부 과거가 된다고 해도 어제의 몸은 오늘의 몸에 영향을 준다. 오늘의 몸은 내일의 몸을, 내일의 몸은 그다음날의 몸을 변화시킬 것이다.... - P-1

369~370p.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실제 싸움에는 확실한 박력이 있었고, 그건 자주 레퍼런스 삼던 소년만화와는 달랐다. 말하자면 각오는 없는데 잔인하달까. 왜 그럴까, 생각하다 때리는 사람이 두려워하지 않아서라는 걸 깨달았다. 맞을 걸 예상하면 웅크리게 될 텐데, 일방적으로 치기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드니 잔혹한 호쾌함이 나오는 거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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