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p.
...나는 성큼성큼 걸었다. 갑자기 훌쩍 자란 느낌이었다. 내가 하나의 개체가 된 만큼 주변 사물도 하나하나 개체로 보였다. 이제 우리는 같은 눈높이로 마주보았다.... - P-1

39p.
..한번은 내가 버린 스웨터를 입은 남자아이를 본 적이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았다. 낡고 해져 더는 나에게 필요 없는 무언가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물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P-1

80p.
..굵직굵직한 사건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바람에, 기억의 그물코가 점점 좁아져 결국엔 망각의 운명에 빠져야 할 사소한 일들까지 함께 기억되는 날들이 있다. 그런 날엔 사소한 일들도 마치 기생충처럼 인상적인 사건들에 깊이 스며들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 P-1

126p.
..바람은 아버지에게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람 중에는 스웨덴 바람, 영국 바람, 러시아 바람, 그리고 희귀한 사막 바람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바람의 세기였다. 바람이 강할수록 바다를 지나온 시간은 짧았다. 아버지가 다시 방에 들어와 내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면 우리는 방금 전 집 밖의 키 큰 피나무에서 소리를 낸 돌풍의 이동 시간을 계산했다. 폭풍이 불면 바람이 해안에서 우리 집까지 오는 데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면 공기에서 소금 냄새가 났고, 피나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 P-1

134p.
...나는 누워 비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방문도 완전히 닫는 법이 없었고, 복도 조명도 계속 켜져 있어야 했다. 길쭉한 빛줄기가 정확히 내 침대 끝을 지나갔다. 나는 빛줄기 속으로 발을 넣었다. 내 몸의 어딘가는 환한 세계에 남아 있어야 했다. 맨발은 깨어 있고 나를 보호해야 했다. 복도의 조명, 살짝 열린 문틈, 빛의 절단면, 다림질하는 어머니, 새로 깐 침대 시트, 비스듬히 열린 창문, 환자들의 지옥 같은 연주로 가득 찬 저녁의 온화함. 이 모든 게 완벽했다.... - P-1

138~139p.
..당시 내가 했던 대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내 대답을 좋아해서 자주 반복했기 때문이다.
.."신발이 너무 잘 맞으면 신발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려요. 마음에 드는 신발을 사면 아빠는 그걸 신고 있다고 항상 떠올리고 싶어 해요. 발이 조이는 신발을 신으면 그걸 신고 있다는 걸 잊을 수가 없어요."
.."오, 영리한 대답이다! 내 생각도 그래. 편안함과 망각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 P-1

192~193p.
...사실 선물이라는 건 그렇게 다루어달라고, 그렇게 파괴해달라고 외치기 마련이다. 만일 내가 잘 부서지는 선물, 예를 들어 완벽하게 깎아놓은 색연필 상자를 받아들면 뭔가 알 수 없는 전율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선물의 원래 성질을 통해 증폭된 일종의 과민 상태였다. 나는 색연필을 받은 것이 기뻤지만 동시에 연필을 부러뜨리는 상상을 했다. 연분홍색부터 검은색까지 서른여섯 자루 모두를. 그렇다면 가족 행사에서 무언가를 망가뜨리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내게 큰 성취였고, 선물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나만의 경건한 헌신이었다. - P-1

261~262p.
...이상하게도 나는 분노 발작 때와 마찬가지로 기쁨의 눈물에도 적절한 대처 방법을 찾지 못했다. 무언가 나를 화나게 해서 미쳐 날뛰면 그건 항상 분노 유발자에 대한 단순한 반응 이상이었다. 분노는 원인을 넘어 나를 다른 세계로 끌고 갔다. 이 상태에 빠지면 나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소멸시키고 싶었고, 룸펠슈틸츠헨처럼 나 자신을 두 동강 내버리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평화롭게 연기를 내뿜는 숯가마를 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행복함과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며 하염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모든 것에 눈물이 터졌고, 내 마음속 깊이 자리한 고통을 울음으로 쏟아냈다.... - P-1

295p.
...지금 돌아보니 어쩌면 우리 가족도 아버지에게는 항상 하나의 관념이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정신병원장으로서의 삶과 요트 선장으로서의 삶, 자급자족하는 농부로서의 삶은 물론이고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의 삶, 그리고 우리 가족조차 아버지가 안락의자에 앉아 책에 몰두하거나 우리와 멀리 떨어져서 만들어낸 하나의 이론일 수 있었다. - P-1

362~363p.
.."네가 하는 일 중에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있고, 내가 하는 일 중에도 너와 상관없는 일이 있어."
..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계속 책을 읽었다.
..나는 몇 달 동안 이 말을 마음의 상처로 안고 다녔는데, 나중에야 아버지의 그 말이 내게도 도움이 되는 큰 자유를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1

478~479p.
..점점 더 그런 느낌이 든다. 과거란 사실 미래보다 훨씬 더 불확실하고 확정되지 않은 곳이 아닐까 하고. 흔히 우리는 내 뒤에 놓인 것이야말로 확정된 것이자 완료된 것이자, 이야기되기만 기다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것은 이른바 아직 만들어가야 할 미래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만일 과거 또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면? 철저히 파고들어 재구성한 과거로부터만 열린 미래 같은 것이 생겨난다면? 이런 생각이 나를 짓누른다. 그럼에도 가끔은 아직 내 앞에 놓인 삶이 내게 맞게 재단된, 피할 수 없이 끝까지 걸어가야 할 구간처럼 느껴진다. 끝까지 조심조심 균형을 잡으며 걸어가야 할 하나의 선처럼.
..그래, 나는 이제 믿는다. 내가 기억의 꾸러미를 다시 하나하나 풀어 꺼내놓을 때, 겉으로 확실해 보이는 과거에 대한 믿음을 접고 과거를 혼돈으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하고 꾸미고 기념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나의 죽은 이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 친숙하면서도 내가 지금껏 인정한 것보다 더 낯설고 자율적인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나는 현재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미래는 그 영원한 약속을 이행하고 불확실해지고, 하나의 선이 하나의 면으로 넓어질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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