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p. «유년의 뜰» ..집의 새 주인은 삿자리를 걷어내고 방바닥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았던 자취는 어디에고 없었다. 나는 사내의 힘찬 삽질에 의해 점차 깊어지는 방 가운데의 구덩이를 보며 알 수 없는 부끄러움과 서러움으로 눈물이 돌았다. 새 주인의 삽질에 의해 뜰의 어느 구석에서인가 재 묻은 닭 털이 끌려 나오고 부서진 거울 조각들이 흙과 뒤섞일 것이다. - P-1
97~98p. «중국인 거리» ...아버지는 피난 시절의 셋방살이 혹은 다리 밑이나 천막에서 아이들을 끌어안고 밤을 새우던 기억에 복수라도 하듯 끊임없이 집을 손질했다. 손바닥만 한 마당을 없애며, 바느질을 처음 배운 계집애들이 가방의 안쪽이나 옷의 갈피짬마다 비밀 주머니를 만들어 붙이듯 방을 들이고 마루를 깔았다. 때문에 집 안에는 개미굴같이 복잡하게 얽힌 좁고 긴 통로가 느닷없이 나타나고, 숨으면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장소가 꼭 한 군데는 있게 마련이었다. - P-1
112p. «중국인 거리» ..나는 다시 손안의 물건들을 나무 밑에 묻고 흙을 덮었다. 손의 흙을 털고 나무 밑을 꼭꼭 밟아 다진 뒤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쓰며 장군의 동상을 향해 걸었다. 예순 번을 세자 동상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두 계절 전 예순다섯 걸음의 거리였다. 앞으로 다시 두 계절이 지나면 쉰 걸음으로도 닿을 수가 있을까, 다시 일 년이 지나면, 그리고 십 년이 지나면 단 한 걸음으로 날듯 닿을 수 있을까. - P-1
131p. «겨울 뜸부기» ..사람마다 분수라는 게 있다는 것, 사는 일이 어렵다는 것, 무엇보다 생활의 안정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어머니의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나였지만 어쩐지 오빠는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애매하게 웃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느낌이라는 게 기실 책임 있게 말할 수 있는 확신도 아니고 뚜렷한 근거를 가진 것도 아닌, 다만 스무 살 나이에 이미 헌 옷가지처럼 남루히 널린 기존의 삶 중 하나를 둘러쓰기 시작한 나 자신의 오빠에 대한 바람—막연한 생각이지만 우리네 사는 삶과는 좀 다른 형태, 다른 색채의 인생을 살아주기를 바라는—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 P-1
147p. «겨울 뜸부기» ..나는 한고비 한고비, 전락이라고나 말해야 할 오빠의 변모를 볼 때마다, 지금보다는 돼지를 기를 때가, 그보다는 혈서를 품고 다닐 때가, 아니 그보다는 여선생의 비로드 치마에 얼굴을 묻을 때가 더욱 좋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 P-1
191p. «꿈꾸는 새» ..남편은 처분해버리라고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전부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다락 속에 있던 것이거든요. 특히 비가 오는 일요일 같은 때 다락에 기어올라가 주섬주섬 읽다 보면 뜻밖에 충격이나 영향을 받는 글들과 더러 만나게 되지 않아요? 제 경우엔 그랬답니다. 아직 갓난아이지만 그래도 자라나는 아이이니 왜 그런 날들이 없겠어요! 이 애를 생각해서라도 쉽게 팔아버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남편은 이 애의 청소년기의 어느 무료한 날, 비 오는 날을 위해 우리가 앞으로 이십 년을 이 책 더미들을 끌고 다녀야 하느냐고 하면서 화를 내요. - P-1
223p. «비어 있는 들» ..입에 거품 방울을 물고 있었다. 남편은 언제부터 낚시를 시작했던가. 내가 그를 기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러한 감정의 과장, 극적인 형태, 도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혐오했다. - P-1
257p. «별사(別辭)» .."더 주무시지 않구요." ..이른 아침 집 앞 골목을 쓸고 온 부지런한 가장에게처럼 그녀는 예사롭게 말했다. 그러면서 돌아서서는, 그에게는 들릴 리 없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예요. 그걸 불행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비 온 뒤 부드럽고 따뜻한 땅에 꽃씨를 뿌리고, 싹이 돋아 피어나는 모습에 놀라 기뻐하는 여자예요.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그날그날을 남들처럼 예사롭게 살아갈 수 있어요. 미래도 있구요. 아이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는 대답할 것이다. 당신은 꽃씨나 뿌리면서 살자 하지만 꽃씨를 뿌리는 마음은 또 무엇이오, 그것은 꽃을 보고자 하는 기다림과 꿈이 있기 때문일 것이오. ..정옥이 미래라고 부르는, 자신이 죽은 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함께 핏줄을 남겨놓고 가기 때문이다. - P-1
286p. «별사(別辭)» ..어머니의 말에 정옥은 말없이 아이에게 신을 신기고 참외 껍질과 달걀 껍데기 따위를 신문지에 꾸려 빈 병과 함께 구럭에 넣었다. 자신들이 떠난 뒤 빈자리에 남을 흔적이 싫기도 했지만 다음에 왔을 때, 이 흔적에서 분명 지금의 이 시간들을 되살리려는 헛된 노력을 하게 될 것이 끔찍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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