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p.
...그동안 나는 존엄이 소유가 아니라 실천 속에 있다는 걸 배웠다. 존엄은 사람이 무언가를 소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견뎌내는 방식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 P-1

39p.
...화면 앞에서, 나는 내가 아직 이름 붙일 수 없었던 무게에 압도된 채 울음을 터뜨렸다. 내 슬픔이 이해를 뜻한다고 믿었다. 내가 틀렸다는 건 내가 그 현실을 살게 된 다음에야 깨달았다. 내가 야르무크에서 보았던 것은 지금 내 안에 살고 있다. 그리고 당신, 소중한 독자여—당신이 아무리 민감하다 한들, 당신의 마음이 아무리 열려 있다 한들—이 느낌을 당신이 정말로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굶주림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거리를 두고 서술될 수 없다. 그것을 알려면 그것을 살아내봐야 한다. - P-1

84p.
...가자에서 번역을 한다는 것은 부서진 문장 구조와 부서진 삶들로 만들어진 다리 위를 걷는 일이다. 그러면서 짊어지기에는 너무 무겁고 내려놓기에는 너무 신성한 이야기들을 실어 나르는 일이다. 그것은 거의 대답하는 일이 없는 바람 속으로 말을 하는 일이며, 오직 그 이름을 말할 용기를 낸 사람에게만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이름들을 속삭이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말을 한다. 번역을 한다. 세계가 변화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번역하지 않는 것은 항복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P-1

97p.
..가자는 내 근육 속에 경계심을 새겨넣었고, 더블린은 휴식을 허락했다. 전자는 견뎌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몸에게 일깨워주고, 후자는 의미가 얼마나 쉽게 흩어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긴장은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고, 그렇게 겹쳐진 상태 속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나는 망명이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두 개의 진실을 동시에 품기 위해 계속되는 노력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중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안전함과 그동안 나를 빚어냈던 위험을. 나는 그것들을 화해시킬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기억이 계속 내 안으로 스며들게 두면서도 그것이 현재를 집어삼키게 두지 않을 수 있다. 이 두 도시에서 살아가는 내 두 현실은 동시에 존재한다. 나는 어떤 삶이 진짜인지 결론 내리려고 더는 애쓰지 않는다. - P-1

106p.
...슬픔이 나눠 입는 옷이기라도 한 것처럼 비통함을 층층이 쌓는다고 해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 모든 재앙은 저마다의 색깔과 문법과 역사를 품고 있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의 시련을 최근의 2년으로만 압축해버리는 것은 수십 년의 세월을 접어버리고 그 접힌 자국이 천 전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내가 분명하게 말을 했다면, 그건 무언가를 단순화하는 것이 언제나 삭제의 첫 번째 행위가 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 P-1

126~127p.
..그럼에도 가자를 구경거리로 만들 위험은 글을 쓰려는 시도 하나하나에 드리워져 있다. 사이드는 잔해를 미학적인 이미지로 변형시키고 폐허를 잘 배열해 먼 곳의 관객을 위한 비극적인 연극으로 만들고픈 이런 유혹에 대해 우리에게 경고한 바 있다. 글쓰기를 이런 덫에서 구해내는 것은 평범한 것에 대한 충실함이다. 추방 상태에서도 계속 유지되는 세부들이 있다. 해질녘 붐비는 피난처에서 나누어 마시는 한 주전자의 차, 칸막이 사이에 임시로 마련된 교실에서 다시 전해지는 할머니의 이야기, 자투리 공간을 두고 다투는 아이들, 화덕은 다른 집의 것일지언정 그릇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밀가루 반죽. 이런 것들은 삶이 계속된다는 증거다. 그것들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추방 상태에서도 살아남기 때문이다. - P-1

148~149p.
...기근이 우리를 야위게 하고 빵이 사라졌을 때에야 나는 더 큰 진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천국은 그저 풍부함만이 아니라 부족함 자체가 없어지는 곳이라는 진실을. 그곳에서 굶주림은 되돌아오지 않는데, 굶주림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목마름도 몸을 갉아대지 않는데, 몸이 처할 가능성에서 목마름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잔나에서 몸은 결핍 없이, 아픔 없이, 박탈의 어휘 없이 재창조된다. - P-1

156p.
..그의 조언은 고통을 부인하는 사람의 순진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절망이 일종의 맹목임을 아는 사람의 분별 있는 지혜다. 세상은 여전히 그 끝없는 복도의 움푹 들어간 곳곳에 문들을 숨겨두고 있으며, 그 문들은 걷기를 그만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다는 지혜. 견뎌낸다는 것은 구원이 어디서 찾아올 것인지 알게 되는 일이 아니라 움직임 그 자체야말로 문이 열릴 가능성을 계속 살아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일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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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p. «유년의 뜰»
..집의 새 주인은 삿자리를 걷어내고 방바닥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았던 자취는 어디에고 없었다. 나는 사내의 힘찬 삽질에 의해 점차 깊어지는 방 가운데의 구덩이를 보며 알 수 없는 부끄러움과 서러움으로 눈물이 돌았다. 새 주인의 삽질에 의해 뜰의 어느 구석에서인가 재 묻은 닭 털이 끌려 나오고 부서진 거울 조각들이 흙과 뒤섞일 것이다. - P-1

97~98p. «중국인 거리»
...아버지는 피난 시절의 셋방살이 혹은 다리 밑이나 천막에서 아이들을 끌어안고 밤을 새우던 기억에 복수라도 하듯 끊임없이 집을 손질했다. 손바닥만 한 마당을 없애며, 바느질을 처음 배운 계집애들이 가방의 안쪽이나 옷의 갈피짬마다 비밀 주머니를 만들어 붙이듯 방을 들이고 마루를 깔았다. 때문에 집 안에는 개미굴같이 복잡하게 얽힌 좁고 긴 통로가 느닷없이 나타나고, 숨으면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장소가 꼭 한 군데는 있게 마련이었다. - P-1

112p. «중국인 거리»
..나는 다시 손안의 물건들을 나무 밑에 묻고 흙을 덮었다. 손의 흙을 털고 나무 밑을 꼭꼭 밟아 다진 뒤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쓰며 장군의 동상을 향해 걸었다. 예순 번을 세자 동상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두 계절 전 예순다섯 걸음의 거리였다. 앞으로 다시 두 계절이 지나면 쉰 걸음으로도 닿을 수가 있을까, 다시 일 년이 지나면, 그리고 십 년이 지나면 단 한 걸음으로 날듯 닿을 수 있을까. - P-1

131p. «겨울 뜸부기»
..사람마다 분수라는 게 있다는 것, 사는 일이 어렵다는 것, 무엇보다 생활의 안정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어머니의 생각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나였지만 어쩐지 오빠는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에 애매하게 웃어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느낌이라는 게 기실 책임 있게 말할 수 있는 확신도 아니고 뚜렷한 근거를 가진 것도 아닌, 다만 스무 살 나이에 이미 헌 옷가지처럼 남루히 널린 기존의 삶 중 하나를 둘러쓰기 시작한 나 자신의 오빠에 대한 바람—막연한 생각이지만 우리네 사는 삶과는 좀 다른 형태, 다른 색채의 인생을 살아주기를 바라는—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몰랐다. - P-1

147p. «겨울 뜸부기»
..나는 한고비 한고비, 전락이라고나 말해야 할 오빠의 변모를 볼 때마다, 지금보다는 돼지를 기를 때가, 그보다는 혈서를 품고 다닐 때가, 아니 그보다는 여선생의 비로드 치마에 얼굴을 묻을 때가 더욱 좋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 P-1

191p. «꿈꾸는 새»
..남편은 처분해버리라고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전부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다락 속에 있던 것이거든요. 특히 비가 오는 일요일 같은 때 다락에 기어올라가 주섬주섬 읽다 보면 뜻밖에 충격이나 영향을 받는 글들과 더러 만나게 되지 않아요? 제 경우엔 그랬답니다. 아직 갓난아이지만 그래도 자라나는 아이이니 왜 그런 날들이 없겠어요! 이 애를 생각해서라도 쉽게 팔아버릴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남편은 이 애의 청소년기의 어느 무료한 날, 비 오는 날을 위해 우리가 앞으로 이십 년을 이 책 더미들을 끌고 다녀야 하느냐고 하면서 화를 내요. - P-1

223p. «비어 있는 들»
..입에 거품 방울을 물고 있었다. 남편은 언제부터 낚시를 시작했던가. 내가 그를 기다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러한 감정의 과장, 극적인 형태, 도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혐오했다. - P-1

257p. «별사(別辭)»
.."더 주무시지 않구요."
..이른 아침 집 앞 골목을 쓸고 온 부지런한 가장에게처럼 그녀는 예사롭게 말했다. 그러면서 돌아서서는, 그에게는 들릴 리 없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예요. 그걸 불행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비 온 뒤 부드럽고 따뜻한 땅에 꽃씨를 뿌리고, 싹이 돋아 피어나는 모습에 놀라 기뻐하는 여자예요.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그날그날을 남들처럼 예사롭게 살아갈 수 있어요. 미래도 있구요. 아이가 있잖아요. 그러면 그는 대답할 것이다. 당신은 꽃씨나 뿌리면서 살자 하지만 꽃씨를 뿌리는 마음은 또 무엇이오, 그것은 꽃을 보고자 하는 기다림과 꿈이 있기 때문일 것이오.
..정옥이 미래라고 부르는, 자신이 죽은 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함께 핏줄을 남겨놓고 가기 때문이다. - P-1

286p. «별사(別辭)»
..어머니의 말에 정옥은 말없이 아이에게 신을 신기고 참외 껍질과 달걀 껍데기 따위를 신문지에 꾸려 빈 병과 함께 구럭에 넣었다. 자신들이 떠난 뒤 빈자리에 남을 흔적이 싫기도 했지만 다음에 왔을 때, 이 흔적에서 분명 지금의 이 시간들을 되살리려는 헛된 노력을 하게 될 것이 끔찍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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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p.
"이제 검은 염소들은 한 마리가 잡아먹히면 그놈이 왜 잡아먹혔는지 알아내느라 대항할 생각을 못할 거야. 뿔이 굽어서 먹혔는지, 다리가 짧아서 먹혔는지, 암놈이라서, 아니면 수놈이라서 먹혔는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겠지. 스스로 먹힐 만한 이유가 있어서 잡아먹히는 거라고 여기는 놈들을 사냥하는 건 식은 죽 먹기지."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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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p.
..최소주의는 우리를 물욕과 사재기의 나쁜 습관에서 해방시킨다. 소유한 물건이 많아질수록 안정감은 줄어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나의 눈에 세상 모든 물건이 다 들어오지 않고 필요한 것만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 내면은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 P-1

79p.
..평안하고 좋은 마음을 유지하고 싶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놓고 고민만 하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살면 될지를 정확히 ‘알면‘ 된다. - P-1

124p.
..세상에는 오직 한 가지 길만이 존재한다. 바로 나 자신의 발아래로 난 그 길 말이다. - P-1

132~133p.
..하루 종일 근심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을 잘 보면 실제 삶에서 불행한 일을 당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그 고민은 내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음을 편하고 가볍게 한 뒤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타일러야 한다. 초조함 또한 지극히 정상적인 심리다. 그러므로 굳이 배척하거나 소홀히 대하지 말고, 적절히 받아들인 뒤 잘 흐르게 해주면 된다. - P-1

136p.
..성숙한 기질과 소양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최고의 매력으로, 물질이나 감정, 혹은 타인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 P-1

170p.
..일본에서는 ‘화재 사후 명세서‘라는 것이 유행했는데, 화재가 발생할 거라고 해도 꼭 구매해야 하는 물건들을 열거한 목록이다. 내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이 목록의 물건들이며, 나머지는 모두 불필요한 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필요치 않은 것들을 정리해야 내게 무엇이 정말로 유용한지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또 그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최소주의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합리적으로 물건을 사용하는 지혜야말로 삶의 진정한 지혜이다. - P-1

230p.
..인맥은 내가 주도해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매력을 바탕으로 남들을 나의 영향권으로 끌어당긴 결과이다. 그리고 인맥이라는 교제권 안에서는 동등한 가치, 즉 등가의 교환이 있어야만 합리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나무꾼과 양치기가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물었다. 그런데 그사이 양치기의 양들은 풀을 배불리 뜯어 먹었지만, 나무꾼은 필요한 장작을 전혀 패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등가의 교환 원리가 무너진 사회적 관계다. - P-1

259p.
..만약 돈의 힘에 의존하여 어떤 기질과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기질이 아니다. 돈의 기질인 셈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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