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p.
.."가끔은 액자가 사진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법이지. 다른 각도에서 시도해 봅시다. 바텐더, 바 뒤로 가 봐요." - P-1

133p.
.."그렇다면 지금도 달려와 줄 걸세.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만한 우정에는 유통 기한이 없는 법이거든. 예전에 그랬다면 지금도 그럴 거야. 지금 안 그렇다면 예전에도 안 그랬다는 방증이고." - P-1

137p.
..이후로 두 사람은 몇 분 동안 변죽을 울렸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담아 두고 다른 이야기만 했다. 생사가 걸린 쓰라리고 피눈물 나는 사연을 앞두고 있으면 보통 이렇게 쑥스럽고 조심스럽기 마련이었다. - P-1

217p.
.."그런 법이잖소. 죽음이라는 건 원래 남의 사정을 살피지 않으니까." - P-1

233p.
..여기저기 궤짝과 빈 상자들이 있었고, 심지어 앉을 수 있는 맥주통까지 한두 개 있었다. 클라리넷의 구슬픈 가락을 시작으로 광란이 시작됐다. 이후로 두 시간은 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편」과 비슷했다. 두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앞으로 이 순간을 떠올리면 꿈처럼 느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음악은 훌륭했다. 벽 위에서 천장까지 시커멓게 너울거리며 주마등처럼 휙휙 지나가는 그림자들 때문이었다.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문득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다시 뒤로 물러나는데, 그렇게 실감이 날 수 없는 그들의 얼굴 때문이었다. 사방을 몽롱하고 꾸물꾸물하게 채운 술과 마리화나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광기에 가끔 겁이 나서 한쪽 구석으로 도망을 치거나 궤짝 위로 두 발을 모두 올려놓고 몸을 웅크렸다. 때로는 몇몇 단원들이 홍일점인 그녀를 지목해 돌아가며 한 명씩 다가와 한쪽 벽면으로 몰아넣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에 대고 관악기를 힘껏 부는 통에 그녀는 귀가 먹먹해지면서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가슴이 공포로 물들었다. - P-1

308p.
...다른 여자들처럼 수많은 고민들로 허덕일 필요가 없으니 인생이 황량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는 실제로 황량한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비누 거품이 터지면서 입술에 비누의 쓴 맛을 남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유리문 사이에 서 있는 동안 옷자락이 날리면서 은색 액체가 물결치며 좁은 문 틈새를 흘러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 P-1

395p.
"...나중에 자네가 무죄라는 확신이 점점 커지면서 빈 공간이 생겼지. 빈 공간은 뭘로 채우지 않으면 스스로 채워지게 되어 있어. 그런데 그와 관련된 사실들이 하나둘씩 흘러나오면서 나도 모르는 새 빈 공간이 채워지기 시작한 거야." - P-1

399p.
"..자살을 하는 그 순간까지 자기 면도날을 가외의 용도로 사용하는 걸 본능적으로 기피했다니 행동주의 심리학자의 연구 대상이지. 그게 인간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는군. 부인이 자기 면도날로 연필을 깎으면 남편들이 폭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래."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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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그들도 자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 좋아하는 것을 사고 또 때를 봐서 처분하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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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많이 할수록 실수도 많아진다. 일을 적게 할수록 실수도 적어지고, 아예 하지 않으면 실수도 없다‘라는 말이 시시때때로 뤄 독찰의 귀에 들려왔다. 그가 1985년 경찰에 투신한 것은 경찰이라는 신분을 동경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경찰이란 악한 자들을 없애고 선량한 시민을 지키며 정의를 수호하는 신성한 의무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새로 경찰이 된 후배들 대다수는 경찰을 ‘신분‘이 아니라 ‘직업‘으로 여겼다.... - P-1

...뤄 독찰은 시간이 부족할 때 사람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쉽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럴 때는 아무리 영리한 범죄자라도 멍청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있었다. - P-1

..하지만 승냥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다. - P-1

..연못 바닥에 더러운 진흙이 잔뜩 쌓여 있더라도 마구 휘젓지 않는다면 연못물은 여전히 맑게 유지된다. 진흙을 퍼내고 싶다면 조심스럽게 조금씩 걷어내야 한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퍼내려 하면 물이 혼탁해지기 쉽다. 연못의 생태계를 자칫 다 망가뜨릴 수도 있다. - P-1

.."샤오밍, 탈옥 역시 살인과 똑같아. 사실은 아주 간단한 거지." 관전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죽이려면 총알 하나만 쏘거나 칼로 가볍게 베기만 해도 돼. 탈옥도 마찬가지지. 인력과 물자가 충분하다면 아무리 삼엄한 감옥이라도 감옥 벽에 구멍을 뚫어서 죄수를 데리고 나갈 수도 있어. 이런 범죄의 어려운 부분은 ‘과정‘이 아니라 ‘끝‘이지. 사람을 죽인 뒤 어떻게 경찰의 눈을 피할 것인가? 탈옥 후 어떻게 경찰의 추적을 피할 것인가? 이것이 살인과 탈옥이 어려운 원인이야." - P-1

"...난 손안의 패를 상대가 못 보게 감추는 것보다 대범하게 다 보여주는 편입니다. 상대방은 내 손만 보고 그게 내 패의 전부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난 그것보다 열 배가 넘는 패를 의자 밑에 숨겨놓고 있거든요. 그래야 더 재밌어지는 겁니다." - P-1

..권력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높은 사람은 이상과 신념, 재물로 유혹해 아랫사람이 목숨도 바치게 만든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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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p.
..언어와 문화는 서로를 파고들며 꼭 붙어 함께 진화한다. 한국어가 말의 가장 작은 단위인 형태소까지 샅샅이 살펴야 상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고도로 맥락화된 언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1

33p.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셔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힘이 센 사람이다. 눈치 사회에서 말을 적게 해도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영화 속 부자나 갱단 두목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주위에서 필요한 것을 척척 대령하는 장면도 같은 이치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권력의 상징이 되면, 질문하고 자꾸 말 시키는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나의 권위를 해치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P-1

50p.
..나는 여기서 간단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가족들이 TV를 보고 있는 거실에 나가 허공을 바라보며 "정이 없네"라는 한마디를 맥락 없이 던져보았다. 가족들은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왜, 뭐 줄까?"라고 묻거나 그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정 없다‘의 실체는 그때 확실해졌다.
..‘정 없다‘는 말은 뭘 달라는 얘기인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은 말을 알아달라는 얘기고, 나조차 모르는 내 신호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해달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정이 떨어진다는 말은 선언도 아니고 질문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위협일 수 있다. ‘나는 지금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정이 떨어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니까 그러지 않도록 조심해‘라는.... - P-1

84~85p.
..누가 개떡같이 뱉어놓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을 필요도 없고 반대로 꼭 찰떡같이 말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한 다음 물어보면 된다. ‘지금 이 발화를 시작하려는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일까?‘라고. - P-1

106p.
..현상에 이름이 붙고 진단이 따르고, 그 언어를 통해 바깥과 연결되는 경험은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을 때, 나조차 나를 돕는 데 관심이 없을 때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하는 일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외부의 말로 붙은 이름을 배우는 것, 그 이름을 통해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아는 것. - P-1

141p.
..즉, 내가 무언가를 보고 노랗거나 까맣거나 희다고 하지 않고 누리끼리하다거나 거무죽죽하다거나 허여멀겋다고 하면, 그것은 단지 색상을 다르게 지칭한 것이 아니라 평가한 것이 된다. 우리 언어는 색상 이름 안에도 주관적인 판단을 숨겨놓았다. - P-1

151p.
...그는 2017년 TED 강연에서 "두 번째 언어를 갖는 것은 두 번째 영혼을 갖는 일이다"라는 샤를마뉴의 말과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그 향기는 여전히 달콤할 것입니다"라고 한 셰익스피어를 인용한다. 언어가 인식을 결정한다는 입장이 샤를마뉴, 언어는 실물 세계를 바꿀 수 없다는 주장이 셰익스피어로 대표된다 치면 이 두 시각의 대결은 매우 오래된 싸움이라는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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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누가 끝이 딱 떨어지는 금액을 빌려달라고 할 때는 주의하는 편이 좋습니다. 숫자가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은 빌리는 사람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주먹구구식이라는 게 뻔히 보이죠. - P-1

..마사타카는 제가 소중히 아끼던 감정을 빼앗아 갔지만 그의 존재는 제가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 최고의 소설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변했습니다. 아주 큰 힘을 가진 원동력으로요.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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