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p. ..언어와 문화는 서로를 파고들며 꼭 붙어 함께 진화한다. 한국어가 말의 가장 작은 단위인 형태소까지 샅샅이 살펴야 상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고도로 맥락화된 언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1
33p.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셔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힘이 센 사람이다. 눈치 사회에서 말을 적게 해도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영화 속 부자나 갱단 두목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주위에서 필요한 것을 척척 대령하는 장면도 같은 이치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권력의 상징이 되면, 질문하고 자꾸 말 시키는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나의 권위를 해치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P-1
50p. ..나는 여기서 간단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가족들이 TV를 보고 있는 거실에 나가 허공을 바라보며 "정이 없네"라는 한마디를 맥락 없이 던져보았다. 가족들은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왜, 뭐 줄까?"라고 묻거나 그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정 없다‘의 실체는 그때 확실해졌다. ..‘정 없다‘는 말은 뭘 달라는 얘기인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은 말을 알아달라는 얘기고, 나조차 모르는 내 신호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해달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정이 떨어진다는 말은 선언도 아니고 질문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위협일 수 있다. ‘나는 지금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정이 떨어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니까 그러지 않도록 조심해‘라는.... - P-1
84~85p. ..누가 개떡같이 뱉어놓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을 필요도 없고 반대로 꼭 찰떡같이 말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한 다음 물어보면 된다. ‘지금 이 발화를 시작하려는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일까?‘라고. - P-1
106p. ..현상에 이름이 붙고 진단이 따르고, 그 언어를 통해 바깥과 연결되는 경험은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을 때, 나조차 나를 돕는 데 관심이 없을 때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하는 일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외부의 말로 붙은 이름을 배우는 것, 그 이름을 통해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아는 것. - P-1
141p. ..즉, 내가 무언가를 보고 노랗거나 까맣거나 희다고 하지 않고 누리끼리하다거나 거무죽죽하다거나 허여멀겋다고 하면, 그것은 단지 색상을 다르게 지칭한 것이 아니라 평가한 것이 된다. 우리 언어는 색상 이름 안에도 주관적인 판단을 숨겨놓았다. - P-1
151p. ...그는 2017년 TED 강연에서 "두 번째 언어를 갖는 것은 두 번째 영혼을 갖는 일이다"라는 샤를마뉴의 말과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그 향기는 여전히 달콤할 것입니다"라고 한 셰익스피어를 인용한다. 언어가 인식을 결정한다는 입장이 샤를마뉴, 언어는 실물 세계를 바꿀 수 없다는 주장이 셰익스피어로 대표된다 치면 이 두 시각의 대결은 매우 오래된 싸움이라는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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