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p. ..그렇지만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제2막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멸망‘이란 역할로 등장해서 최후까지 퇴장하지 않는 남자도 있다.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는 유년과 소년 시대의 내 고백을 작은 유서로 써내려갔지만 그 유서가 오히려 마음에 걸려 나의 허무에 작은 등불을 밝혔다. 죽을 수가 없었다. 「추억」 한 편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까지 썼으니 모두 쓰자. 지금까지의 내 생활 전부를 털어놓고 싶다.
60p. ...나 혼자만을 망나니 아들로 해두고 싶었다. 그러면 주위 사람도 나 때문에 휘말릴 일은 없다고 믿었다. 유서를 만들기 위해서 일 년이 필요하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나를 소위 시적인 몽상가라고 취급하는 것이 무엇보다 싫었다. 형들 역시 그런 비현실적인 얘기를 듣는다면 송금을 하고 싶어도 중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정을 알면서 송금했다면 세상 사람들은 형들을 나와 공범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것이 싫었다. 나는 진심으로 어디까지나 교활한 동생이 되어 형들을 기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67p. ..이제 더는 아무것도 팔 것이 없었다. 뚝딱 새 작품을 쓸 수도 없었다. 이미 재료가 바닥나서 아무것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 무렵 문단은 나를 "재능은 있는데 덕이 없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나 자신은 "덕의 씨는 있지만 재능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내게는 소위 말하는 문재(文才)라는 것은 없다. 몸으로 부딪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융통성이 없는 촌놈이다. 하룻밤 밥 한 끼를 신세지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반대로 자포자기에 빠져 파렴치한 행동만 하게 되는 타입이다....
73p. ...나에게는 이미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할 만한 특권이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마이너스뿐이다. 그 자각과 함께 하숙방에서 죽을 기백도 없이 뒹구는 사이에 이상하게도 몸이 눈에 띄게 건강해졌다는 사실도 크게 한몫을 했다. 또 나이, 전쟁, 역사관의 동요, 태만에 대한 혐오, 문학에 대한 겸손, 신은 있다는 생각 등 여러 가지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전기(轉機)를 설명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헛된 구석이 있는 법이다. 그 설명이 아무리 정확한 것이라 해도 반드시 어딘가에는 거짓의 요소가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란 항상 그렇게 생각한 대로 행로를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길을 걷고 있다.
76p. ..여기는 동경 시외이지만 바로 근처에 있는 이노가시라 공원도 동경의 명소 가운데 하나로 꼽히니까 이 무사시노의 석양을 동경 팔경 속에 포함시켜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나머지 7경을 정하려고 나는 가슴속 앨범을 펼쳐보았다. 그러나 이 경우 예술이 되는 것은 동경의 풍경이 아니었다. 풍경 속의 나였다. 예술이 나를 기만한 것인지 내가 예술을 기만한 것인지. 결론은, 예술은 나다.
118~119p. ...사람은 완벽한 듬직함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방정맞게 껄껄대며 웃게 되는가 보다. 좀 이상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온몸의 나사가 풀어져 허리띠를 풀고 웃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인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자마자 그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면 그거야말로 축하를 해야 할 일이다. 절대로 연인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마시라. 그것은 당신을 만나 당신의 그 완벽한 신뢰감을 온몸으로 느꼈다는 뜻이니까.
155p. ...나는 안경을 벗고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안경 밖의 뿌연 시야는 마치 꿈속에 와 있는 것 같은, 한 폭의 근사한 그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지저분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크고 강렬한 색과 빛만이 눈에 들어온다. 안경을 벗고 사람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한다. 상대방의 얼굴이 부드럽고, 깨끗하게 웃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안경을 벗고 있을 땐 결코 다른 사람과 싸우고 싶다거나 욕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다른 사람 눈에는 좋은 인상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하면 더욱 안심이 되어 실제로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266p. ...나는 팔을 내밀어 큰형님과 작은형에게 술을 따랐다. 형들은 나를 용서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 용서하지 않은 것일까? 이젠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평생 용서 받을 리가 없기 때문에 용서해줄 거라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 결국은 내가 형들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지가 문제다. 사랑하는 자는 행복하다. 내가 형들을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괜한 미련 같은 것은 버려야 한다고 내 잔에 술을 따라 마시면서 쓸데없는 자문자답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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