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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p.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는 혹은 무대와 객석에는 그 간격만큼의 다정함이 있다. 상대와 대화하느라 거리가 가까워지지도 않고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끝없이 느끼는 것이 평온함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애를 응원할 때, 나라는 모든 것을 걸고서 빠져들 때, 일방적이라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족된다.

83p.
...오후, 전철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어딘지 태평하고 한가로워 보일 때가 있는데, 아마도 ‘이동하는 중‘이라는 안심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이동하지 않아도 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안도, 그러니까 속편하게 휴대폰을 보거나 잘 수 있다. 대기실 같은곳도 그렇다. 햇살조차 차가운 방에서 코트를 껴입고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에는 때때로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따스한 다정함이 있다. 만약 우리집 소파였다면, 내 체온과 냄새가 스며든 담요 속이라면 달라진다. 게임을 하거나 낮잠을 자더라도 해가 저물 때까지 걸리는 시간만큼 마음 어딘가에 새까만 초조함이 달라붙는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괴롭기도 하다.

128p.
..나를 명확하게 아프게 한 것은 그 여자가 안고 있던 빨래였다. 내 방에 있는 엄청난 양의 파일과 사진, CD, 필사적으로 긁어모은 수많은 것들보다 셔츠 단 한 장이, 겨우 양말 한 켤레가 한 사람의 현재를 느끼게 한다. 은퇴한 최애의 현재를 앞으로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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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곧 죽음이라면, 그리하여 이미 죽어 있다면, 여생은 그저 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열면서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일단 실제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이미 죽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여도, 그 별은 이미 사라졌을 수 있다. 별이 폭발하기 전에 발산한 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우리가 그 별을 지금 보고 있을 뿐. 나와 공동체는 이미 죽었는데 현재 부고가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

..그렇게 연민을 가질 때, 사람은 비로소 상대에게 너무 심한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인인 공자孔子님이 왜 성인인지에 대해서, 맹자孟子는 다음과 같이 짧게 말한 바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너무 심한 일은 하지 않으셨다仲尼不爲已甚者."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는, 인생이라는 극장 위의 배우들이 이처럼 별생각 없이 자기가 맡은 배역을 수행한다. 당시 교수들도 자신이 위력을 행사하고 있으리라고는 새삼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 위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위력은 그저 작동한다. 가장 잘 작동할 때는 직접 명령할 필요도 없다. 니코틴이 부족해 보이면, 누군가 알아서 담배를 사러 나간다.

..실로 사람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만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것도 그리워한다. 부재不在를 견디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소진되는 생生. 지친 사람들은 낮은 곳에 모여, 파울 클레Paul Klee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이야기한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를 그리워한다. 나도 눈물이 흐르기 전에 무엇인가 적어 벽에 붙여놓았다.

...악이 너무도 뻔뻔할 경우, 그 악의 비판자들은 쉽게 타락하곤 한다. 자신들은 저 정도로 뻔뻔한 악은 아니라는 사실에 쉽게 안도하고, 스스로를 쉽사리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악과 악의 비판자는 일종의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 악을 요청한다. 상대가 나쁘면 나쁘다고 생각할수록 비판하는 자신은 너무나 쉽게 좋은 사람이 된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매개되지 않은 채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는 영화공간은 신화적 공간에 가깝다. 비록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관심에 침윤된 영화라 할지라도 이러한 신화적 시도가 성공할 경우, 각 인물들은 전형성을 띠게 되고 에피소드는 정전으로서 기능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물론 우리는 그 속에서 살면서 나름대로 자잘한 판단들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주어져 있는 커다란 삶의 조건 속에서의 선택들이다. 사실 그 조건 자체에 대한 선택과 판단은 배제되어 있다. 새로운 생명을 이 세계에 들어서게 할 것인가 하는 판단이야말로 유일하게 그 조건에 대한 판단일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조건이 가진 경우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판단에 불과하긴 해도, 그것은 정말 유일한, 조건 자체에 대한 판단인 것이다....

...살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긍정은 이성이라는 허공보다는 그 큰 자연의 일부로 우리가 위치 지워져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을 아는 자는 우리 삶이 ‘우리가 출 수 있는 유일한 춤’임을 알고 살아내는 자다. 이렇게 보자면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이나 자살하는 일은 결국 자연과 보조를 맞추는 일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일이 된다.

..이처럼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대상을 장악하게끔 해준다. 하지만 한니발에게 지식은 단지 대상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는 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지식을 통해 뭇 대상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데까지 이른 사람이다. 그렇다. 지식이 지식의 소유자에게 가져다주는 보다 깊은 신비는 바로 지식이 그와 대상의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어찌되었거나, 결국 냉정한 지식, 그리고 그러한 지식이 설정하는 자아와 대상의 관계는 자아에게 대상에 대한 대단한 통제력과 자유 —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도덕마저도 뛰어넘는 — 를 부여한다. 그렇다, 많이 아는 자는 자유로운 것이다. 정말로 진리, 아니 지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냉정한 지식이 새로이 설정해준 대상과의 관계에 힘입어 우리는 더 이상 대상에 대한 정서적 노예가 되지 않는다.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자아 창조의 과정은 개인을 사회에 통합시켜나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안티테제antithese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다....

..인간의 삶에 대한 보다 심오한 통찰에 근거하여 행동의 불가능성을 확인한 이에게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재량하여 성취해나가는 기획자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그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기획하고 행동하는 일은 곧 세계와 자신에 대한 거짓말의 토대에서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기획은 곧 실패다. 그는 이제 현실에서의 승리, 현실에서의 보람 있는 성취라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며, 또한 모순에 찬 것인가를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의 상처받은 영혼은 말한다. 누군가 무엇을 성취했다면, 그것은 성취가 아니라 오물이다. 성취하지 않기를 장렬히 기도하라. 그것이 곧 성취이니. 이 아이러니의 시대에 그를 사로잡는 것은 반反영웅이다. 이 시대의 영웅은 유물론자가 아니라 관념론자이고, 이성주의자가 아니라 미친놈이며, 마르크스가 아니라 고스트 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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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당겨진 활시위와 같다는 것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진리다. 현재의 상태는 여러 가지 상반되는 힘들이 평형을 이뤄 나타난 결과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풀려 화살이 앞으로 튀어 나가게 되면 거기서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새로운 세상의 시작은 과거 세계의 파괴다. 화살의 발사라는 새로운 사건은 당겨진 활시위라는 이전 사건의 종료다.

...아무리 긍정적인 방향의 에너지라고 해도, 한 방향으로만 향하는 에너지는 모든 것을 휩쓸어갈 뿐이다. 그것에 반하는 방향의 에너지는 아무리 그것이 사소해 보일지라도, 심지어 아무리 그것이 사악해 보일지라도 평형이라는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행복을 흘러넘치는 긍정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시각이다. 정신의 행복은 긍정성이라는 물을 안정적으로 담고 있는 부정성의 견고한 그릇을 전제로 한다.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그 행위를 선택하는 데 기초가 된, 혹은 만약 숙고해봤다면 선택의 기초가 되었을 우선적인 이유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의 많은 행위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행위들까지 포함해서, 다소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그 행위들에 대해 우선적인 이유들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사후의 일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게 [행위의 이유를 재구성]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스스로를 반성적 행위자로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원인을 넘어서 이유를 찾아 헤매는 존재다. 이유를 잃으면, 이유에 대한 갈망을 잃으면, 그곳에는 더 이상 자유가 없다.

..삶을 소설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겪는 일들은 곧 소설의 소재에 해당할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경험을 통해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는 곧 소설의 표현에 해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똑같이 놀이동산에 놀러 가서 똑같은 일(소재)을 겪는다고 해도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느끼는지(표현)는 천차만별이다. 소설이 단순히 소재의 나열이 아니듯이, 삶은 단순히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다. 삶은 사건들을 나름의 의미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로 조직하고 표현해나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스스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지금 우리가 가진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되거나, 혹은 모든 앎을 멈추고 무로 흩어질 것이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열린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 사이에는 비슷한 구석이 많다. 사실 비슷한 면이 더 많고 차이는 비교적 적다. 상대방과의 차이가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실제로 차이가 압도적으로 커서가 아니다. 그 차이를 바탕으로 상대와 나를 나누고 그 안에서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려는 우리의 경향 때문이다. 이런 경향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차이와 우월감이 주는 즐거움은 인간 심리를 지탱해주는 주요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태를 정확히 보는 것을 방해한다. 상대의 생각을 더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적은 차이를 부풀려서 강조하기보다는 나와 상대방 사이에 놓인 수많은 공통점을 인정하면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사태를 더 정확하게 보는 길이고, 서로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진실한 고찰은 나 자신이 고고하고 접근 불가능한 주관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이 세계 안의 나의 현존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나는 내가 보는 것들로 이뤄진 존재이고, 나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이루는 장이다. 그리고 나의 몸과 역사적 상황은 나의 존재에 있어서 제약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 몸과 이 상황 속에 있음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을 통해 내가 이뤄진다.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따르고 있는 삶의 방식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방식은 항상 나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의 이득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설정된 측면이 있다.

..소크라테스라는 멘토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특정한 지식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지적 겸손 속에서 자유로운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으니 더 좋은 생각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알려달라는 정신의 여유를 가진 사람은 독단적인 견해에 빠져 오직 한 길만을 고집하며 평생을 보내지 않는다. 정답을 빗겨나갈까 봐, 오답을 고를까 봐 노심초사하지도 않는다. 정답은 그리 단순히 얻어지는 게 아니라 기나긴 지적 여정을 통해 차차 모습을 갖춰나간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치와 목표에 대해 영원하고 확실한 정답을 단번에 제시해줄 수 있는 족집게 강사는 없다. 오직 자유롭고 비판적인 성찰과 토론을 통해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의 정답을 찾아나갈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본래적인 나를 마주하는 것은 내 안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아니다. 본래적인 나를 만나는 것은 세상의 온갖 목소리가 뒤섞여 내 안에 우글거리고 있는 와중에도 결국에는 그 중심에서 언젠가 홀로 죽음을 마주해야 할 자신, 그 고독한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다. 그 세인의 존재를 발견하고 인지하고 장악하는 것이다.

..연극이 끝난 후 텅 빈 무대를 나 홀로 응시하는 경험은 어딘가 야릇한 느낌을 전달해준다. 모두가 잠든 새벽, 나 홀로 고요한 거리를 걷는 것은 어쩐지 모르게 가슴을 간지럽힌다. 이런 정체 모를 감정이 생겨나는 원인은 이 경험들이 죽음의 순간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험들은 모두 텅 비어 있는 게 특징이다. 평소에 너무나 당연한 듯이 공간과 시간을 가득 매우고 활발하게 움직이던 많은 사물과 사람이 이 경험들에서는 모두 침묵을 지킨다. 그러면서 텅 빈 공간과 시간이 돌연 나의 의식을 강타한다. 처음으로 나는 공간과 시간을 있는 그대로 또렷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그 시공간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뒤섞여 살아간다고 해도 결국엔 혼자서 짊어져야 할 짐을 지닌 존재인 나 자신을 말이다.

..반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만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계속해서 삶이라는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카뮈는 이런 사람을 부조리한 인간이라고 불렀다. 부조리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누구보다 더 절대적인 자유를 얻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 자체를 자신의 의지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흔히 ‘자유’라는 개념은 나의 행동을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오늘 한식을 먹을지 중식을 먹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자유롭다. 이런 의미에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삶 쪽을 선택해 계속해서 삶이라는 이야기를 지속시키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자유의 무대로 만들 수 있다.

..반면, 삶에 대한 어떤 의미와 이유도 절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종속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진정한 자유에 대해 카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조리한 인간]은 희망하는 방법을 잊었다. 이 현재라는 지옥은 그의 최종적인 왕국이 되었다. (중략) 이 점과 관련해 부조리는 나를 계몽한다. 미래는 없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내적 자유의 이유다.
..희망과 미래를 포기한 사람,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삶의 진정한 의미 같은 것은 발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직시하고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오히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희망과 의미로부터의 자유라는 가장 강력한 자유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에 자유롭게 종속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 자유와 종속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종속을 항상 외부의 힘에 의해 억지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점을 바꿔 생각해보면, 외부의 강압 없이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에 종속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할 절대적인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평생 가난한 사람을 돕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은 외부의 힘에 의해 종속되는 것이다. 그에게는 타인의 시선이 선행을 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이유로 작용한다. 반면 어떤 절대적인 이유도 없이 스스로 신념을 부여해 선행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본인의 자유 안에서 행동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자유와 종속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자유로부터의 자유라는 역설적인 상태. 이것이 부조리한 인간이 걷게 되는 길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을 크로노스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에 반대하고 카이로스를 자각하는 경험을 다양한 관점에서 표현하고자 했다. 카이로스를 출현시키는 힘은 우리의 주의력과 관심이다. 양적인 시간은 끊임없이 미래로부터 흘러와 과거로 흘러가고, 일상의 수많은 순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은 채 지나가버린다. 그 시간을 기회의 순간으로, 결단의 순간으로, 의미를 가진 시간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다.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 시간을 응시하고, 말을 걸고, 손짓하면 시간은 우리에게 의미를 되돌려줄 것이다. 시간을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닌 무언가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인식하는 것. 그러한 경험을 전달하는 게 이 책의 또 다른 중요한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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