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당겨진 활시위와 같다는 것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진리다. 현재의 상태는 여러 가지 상반되는 힘들이 평형을 이뤄 나타난 결과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풀려 화살이 앞으로 튀어 나가게 되면 거기서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새로운 세상의 시작은 과거 세계의 파괴다. 화살의 발사라는 새로운 사건은 당겨진 활시위라는 이전 사건의 종료다.

...아무리 긍정적인 방향의 에너지라고 해도, 한 방향으로만 향하는 에너지는 모든 것을 휩쓸어갈 뿐이다. 그것에 반하는 방향의 에너지는 아무리 그것이 사소해 보일지라도, 심지어 아무리 그것이 사악해 보일지라도 평형이라는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행복을 흘러넘치는 긍정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시각이다. 정신의 행복은 긍정성이라는 물을 안정적으로 담고 있는 부정성의 견고한 그릇을 전제로 한다.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 그 행위를 선택하는 데 기초가 된, 혹은 만약 숙고해봤다면 선택의 기초가 되었을 우선적인 이유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의 많은 행위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행위들까지 포함해서, 다소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그리고 그 행위들에 대해 우선적인 이유들을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사후의 일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게 [행위의 이유를 재구성]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스스로를 반성적 행위자로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원인을 넘어서 이유를 찾아 헤매는 존재다. 이유를 잃으면, 이유에 대한 갈망을 잃으면, 그곳에는 더 이상 자유가 없다.

..삶을 소설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겪는 일들은 곧 소설의 소재에 해당할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경험을 통해 무엇을 느끼며 살아가는지는 곧 소설의 표현에 해당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똑같이 놀이동산에 놀러 가서 똑같은 일(소재)을 겪는다고 해도 그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무엇을 느끼는지(표현)는 천차만별이다. 소설이 단순히 소재의 나열이 아니듯이, 삶은 단순히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다. 삶은 사건들을 나름의 의미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로 조직하고 표현해나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스스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지금 우리가 가진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되거나, 혹은 모든 앎을 멈추고 무로 흩어질 것이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열린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 사이에는 비슷한 구석이 많다. 사실 비슷한 면이 더 많고 차이는 비교적 적다. 상대방과의 차이가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실제로 차이가 압도적으로 커서가 아니다. 그 차이를 바탕으로 상대와 나를 나누고 그 안에서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려는 우리의 경향 때문이다. 이런 경향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차이와 우월감이 주는 즐거움은 인간 심리를 지탱해주는 주요인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태를 정확히 보는 것을 방해한다. 상대의 생각을 더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적은 차이를 부풀려서 강조하기보다는 나와 상대방 사이에 놓인 수많은 공통점을 인정하면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사태를 더 정확하게 보는 길이고, 서로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진실한 고찰은 나 자신이 고고하고 접근 불가능한 주관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이 세계 안의 나의 현존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나는 내가 보는 것들로 이뤄진 존재이고, 나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이루는 장이다. 그리고 나의 몸과 역사적 상황은 나의 존재에 있어서 제약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 몸과 이 상황 속에 있음으로써, 그것들을 통해,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을 통해 내가 이뤄진다.

...사람들은 지금 자신이 따르고 있는 삶의 방식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방식은 항상 나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의 이득에 봉사하는 방향으로 설정된 측면이 있다.

..소크라테스라는 멘토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특정한 지식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지적 겸손 속에서 자유로운 정신으로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자신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으니 더 좋은 생각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와서 알려달라는 정신의 여유를 가진 사람은 독단적인 견해에 빠져 오직 한 길만을 고집하며 평생을 보내지 않는다. 정답을 빗겨나갈까 봐, 오답을 고를까 봐 노심초사하지도 않는다. 정답은 그리 단순히 얻어지는 게 아니라 기나긴 지적 여정을 통해 차차 모습을 갖춰나간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치와 목표에 대해 영원하고 확실한 정답을 단번에 제시해줄 수 있는 족집게 강사는 없다. 오직 자유롭고 비판적인 성찰과 토론을 통해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의 정답을 찾아나갈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본래적인 나를 마주하는 것은 내 안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 아니다. 본래적인 나를 만나는 것은 세상의 온갖 목소리가 뒤섞여 내 안에 우글거리고 있는 와중에도 결국에는 그 중심에서 언젠가 홀로 죽음을 마주해야 할 자신, 그 고독한 주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다. 그 세인의 존재를 발견하고 인지하고 장악하는 것이다.

..연극이 끝난 후 텅 빈 무대를 나 홀로 응시하는 경험은 어딘가 야릇한 느낌을 전달해준다. 모두가 잠든 새벽, 나 홀로 고요한 거리를 걷는 것은 어쩐지 모르게 가슴을 간지럽힌다. 이런 정체 모를 감정이 생겨나는 원인은 이 경험들이 죽음의 순간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험들은 모두 텅 비어 있는 게 특징이다. 평소에 너무나 당연한 듯이 공간과 시간을 가득 매우고 활발하게 움직이던 많은 사물과 사람이 이 경험들에서는 모두 침묵을 지킨다. 그러면서 텅 빈 공간과 시간이 돌연 나의 의식을 강타한다. 처음으로 나는 공간과 시간을 있는 그대로 또렷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그 시공간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와 뒤섞여 살아간다고 해도 결국엔 혼자서 짊어져야 할 짐을 지닌 존재인 나 자신을 말이다.

..반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만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계속해서 삶이라는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카뮈는 이런 사람을 부조리한 인간이라고 불렀다. 부조리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누구보다 더 절대적인 자유를 얻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 자체를 자신의 의지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흔히 ‘자유’라는 개념은 나의 행동을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오늘 한식을 먹을지 중식을 먹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자유롭다. 이런 의미에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삶 쪽을 선택해 계속해서 삶이라는 이야기를 지속시키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자유의 무대로 만들 수 있다.

..반면, 삶에 대한 어떤 의미와 이유도 절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종속당하지 않는다. 이러한 진정한 자유에 대해 카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조리한 인간]은 희망하는 방법을 잊었다. 이 현재라는 지옥은 그의 최종적인 왕국이 되었다. (중략) 이 점과 관련해 부조리는 나를 계몽한다. 미래는 없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내적 자유의 이유다.
..희망과 미래를 포기한 사람,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삶의 진정한 의미 같은 것은 발견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직시하고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오히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희망과 의미로부터의 자유라는 가장 강력한 자유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에 자유롭게 종속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얼핏 보기에 자유와 종속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종속을 항상 외부의 힘에 의해 억지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점을 바꿔 생각해보면, 외부의 강압 없이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에 종속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할 절대적인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평생 가난한 사람을 돕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주변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는 사람은 외부의 힘에 의해 종속되는 것이다. 그에게는 타인의 시선이 선행을 해야만 하는 절대적인 이유로 작용한다. 반면 어떤 절대적인 이유도 없이 스스로 신념을 부여해 선행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본인의 자유 안에서 행동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자유와 종속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자유로부터의 자유라는 역설적인 상태. 이것이 부조리한 인간이 걷게 되는 길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을 크로노스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것에 반대하고 카이로스를 자각하는 경험을 다양한 관점에서 표현하고자 했다. 카이로스를 출현시키는 힘은 우리의 주의력과 관심이다. 양적인 시간은 끊임없이 미래로부터 흘러와 과거로 흘러가고, 일상의 수많은 순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은 채 지나가버린다. 그 시간을 기회의 순간으로, 결단의 순간으로, 의미를 가진 시간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다.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 시간을 응시하고, 말을 걸고, 손짓하면 시간은 우리에게 의미를 되돌려줄 것이다. 시간을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닌 무언가 할 수 있는 기회의 장으로 인식하는 것. 그러한 경험을 전달하는 게 이 책의 또 다른 중요한 목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