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곧 죽음이라면, 그리하여 이미 죽어 있다면, 여생은 그저 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열면서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일단 실제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이미 죽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여도, 그 별은 이미 사라졌을 수 있다. 별이 폭발하기 전에 발산한 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우리가 그 별을 지금 보고 있을 뿐. 나와 공동체는 이미 죽었는데 현재 부고가 도달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

..그렇게 연민을 가질 때, 사람은 비로소 상대에게 너무 심한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인인 공자孔子님이 왜 성인인지에 대해서, 맹자孟子는 다음과 같이 짧게 말한 바 있습니다. "공자께서는 너무 심한 일은 하지 않으셨다仲尼不爲已甚者."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는, 인생이라는 극장 위의 배우들이 이처럼 별생각 없이 자기가 맡은 배역을 수행한다. 당시 교수들도 자신이 위력을 행사하고 있으리라고는 새삼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 위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위력은 그저 작동한다. 가장 잘 작동할 때는 직접 명령할 필요도 없다. 니코틴이 부족해 보이면, 누군가 알아서 담배를 사러 나간다.

..실로 사람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만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것도 그리워한다. 부재不在를 견디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소진되는 생生. 지친 사람들은 낮은 곳에 모여, 파울 클레Paul Klee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이야기한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를 그리워한다. 나도 눈물이 흐르기 전에 무엇인가 적어 벽에 붙여놓았다.

...악이 너무도 뻔뻔할 경우, 그 악의 비판자들은 쉽게 타락하곤 한다. 자신들은 저 정도로 뻔뻔한 악은 아니라는 사실에 쉽게 안도하고, 스스로를 쉽사리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악과 악의 비판자는 일종의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 악을 요청한다. 상대가 나쁘면 나쁘다고 생각할수록 비판하는 자신은 너무나 쉽게 좋은 사람이 된다.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매개되지 않은 채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는 영화공간은 신화적 공간에 가깝다. 비록 특정한 사회적, 역사적 관심에 침윤된 영화라 할지라도 이러한 신화적 시도가 성공할 경우, 각 인물들은 전형성을 띠게 되고 에피소드는 정전으로서 기능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물론 우리는 그 속에서 살면서 나름대로 자잘한 판단들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 주어져 있는 커다란 삶의 조건 속에서의 선택들이다. 사실 그 조건 자체에 대한 선택과 판단은 배제되어 있다. 새로운 생명을 이 세계에 들어서게 할 것인가 하는 판단이야말로 유일하게 그 조건에 대한 판단일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조건이 가진 경우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판단에 불과하긴 해도, 그것은 정말 유일한, 조건 자체에 대한 판단인 것이다....

...살고자 하는 강한 욕구와 긍정은 이성이라는 허공보다는 그 큰 자연의 일부로 우리가 위치 지워져 있다는 느낌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을 아는 자는 우리 삶이 ‘우리가 출 수 있는 유일한 춤’임을 알고 살아내는 자다. 이렇게 보자면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이나 자살하는 일은 결국 자연과 보조를 맞추는 일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일이 된다.

..이처럼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대상을 장악하게끔 해준다. 하지만 한니발에게 지식은 단지 대상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는 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지식을 통해 뭇 대상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데까지 이른 사람이다. 그렇다. 지식이 지식의 소유자에게 가져다주는 보다 깊은 신비는 바로 지식이 그와 대상의 관계를 변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어찌되었거나, 결국 냉정한 지식, 그리고 그러한 지식이 설정하는 자아와 대상의 관계는 자아에게 대상에 대한 대단한 통제력과 자유 —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도덕마저도 뛰어넘는 — 를 부여한다. 그렇다, 많이 아는 자는 자유로운 것이다. 정말로 진리, 아니 지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냉정한 지식이 새로이 설정해준 대상과의 관계에 힘입어 우리는 더 이상 대상에 대한 정서적 노예가 되지 않는다.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자아 창조의 과정은 개인을 사회에 통합시켜나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안티테제antithese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다....

..인간의 삶에 대한 보다 심오한 통찰에 근거하여 행동의 불가능성을 확인한 이에게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재량하여 성취해나가는 기획자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그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기획하고 행동하는 일은 곧 세계와 자신에 대한 거짓말의 토대에서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기획은 곧 실패다. 그는 이제 현실에서의 승리, 현실에서의 보람 있는 성취라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며, 또한 모순에 찬 것인가를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그의 상처받은 영혼은 말한다. 누군가 무엇을 성취했다면, 그것은 성취가 아니라 오물이다. 성취하지 않기를 장렬히 기도하라. 그것이 곧 성취이니. 이 아이러니의 시대에 그를 사로잡는 것은 반反영웅이다. 이 시대의 영웅은 유물론자가 아니라 관념론자이고, 이성주의자가 아니라 미친놈이며, 마르크스가 아니라 고스트 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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