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팔을 휘두르고 바닥을 박차며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열심히 달렸다. 가속하는 다리는 그때까지 잠들어 있던 진정한 자신이 눈을 뜬 듯 가벼웠다. 곤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화살처럼 사라졌다. 그때 몸속의 모든 세포가 하나도 빠짐없이 불꽃을 내뿜는 것 같은 감각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형은 살해당했고 부모는 나를 남기고 미국에 갔다. 그래도 만년상업대루의 구둣가게에서 농구화를 훔쳤을 때 나는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살려고 했다. 우리 앞에 이제 막 시작된 여름방학이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기억이 불러온 감각은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것과 비슷했다. 유리컵에 물을 붓는 것처럼 추락의 풍경은 사라지지 않고 내 몸을 채웠다.

..나는 진심 안타까운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은 한수밍이 아무 데도 없어서 좋았다. 만약 발견되면 우리는 잔혹한 짓을 하게 되었을 테니까. 같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나와 제이의 관계는 뒤틀려 있었다. 화해하기 위해서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아아, 집오리가 된 기분이야." 바닥을 쓸면서 아강이 커다란 목소리로 내뱉었다. "막대기를 든 녀석이 우리를 어딘가로 몰고 가는 것 같아."

...그 떠들썩한 날들 속에서 나는 그저 불행할 것이라는 예감에 겁먹었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인데 불행의 예감은 불행 자체보다 호되다. 거대하고 사악한 싹이 트고 있는 그림자의 정체가 작고 귀여운 생명체일 때도 있다. 사람은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반대로 무슨 일에든 불행해질 수 있다....

..그들은 오랜 전우처럼 서로를 놀리며 당연하다는 듯 나까지 끌어들여 웃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느낌이다. 바닥에 떨어져 깨진 술병은 아주 한순간 동안만 병의 형태를 유지했다. 병이 깨졌다는 사실을 안에 든 술이 아직 깨닫지 못한 듯. 그것은 예리한 칼이 몸을 베고 지나갈 때 바로 피가 나지 않는 것과 같다. 잠깐의 틈을 두고 병이 폭발한다. 코를 찌르는 고량주가 튄다. 내가 전혀 보지 못한 광경을 나는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 볼 수 있었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마지막 날이었다.

..아버지가 꿈지럭거리며 몸을 움직이자 바닥에 떨어졌던 어스름한 불빛 속의 그림자도 천천히 움직였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당황했고 조금은 될 대로 되라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래서 더 아버지보다 정직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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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는 망자들이 항상 그러하듯 과연 망자답게 유달리 묵직하게 누워 있었다. 빳빳하게 굳은 사지는 관 바닥에 푹 잠기고 영원히 젖혀진 머리는 베개에 닿아 있었으며, 여느 망자들처럼 밀랍같이 누런 이마와 움푹 꺼진 관자놀이의 맨살, 윗입술을 짓누를 듯 우뚝 솟은 코를 내놓고 있었다. 그는 표트르 이바노비치가 보지 못한 사이에 더 여위어서 몹시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모든 망자처럼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의미심장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는 해야 할 일을 해냈고 더욱이 제대로 해냈다는 표정이 어리어 있었다. 그 밖에도 아직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나 무언가를 경고하는 기색이 담긴 표정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 권력을 남용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애썼다. 바로 이런 권력을 의식하고 그것을 부드러이 부릴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새로운 직책이 주는 흥미와 매력의 핵심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 단장한 집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항상 그렇듯이 아무리 살기 좋은 집이어도 딱 방 한 칸이 부족하기 마련이고, 또 수입이 늘어나도 딱 얼마가, 그러니까 500루블 정도가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참 좋았다. 특히 집 단장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서 뭘 더 사들이고 주문하고 재배치하고 다듬고 손봐야 할 것이 여전히 남아 있던 시절이 참 좋았다....

..이러한 거짓 말고도, 혹은 그 때문에 더더욱 이반 일리치를 괴롭힌 것은 아무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불쌍히 여겨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기나긴 고통을 맛본 뒤에 이반 일리치는 때때로 이렇게 고백하기가 창피스럽지만, 누구든 자기를 아픈 아이처럼 그저 불쌍히 여겨 주길 무엇보다 바랐다. 아이를 어루만지고 달래 주듯 상냥히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자신을 위해 울어 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턱수염이 허옇게 센 고위 판사에게 아무도 그렇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래 주길 바랐다. 그런데 게라심과 있으면 그 비슷한 뭔가를 느꼈고, 그와의 관계에서 위안을 얻었다. 엉엉 울고 싶고,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울어 주고 어루만져 주길 바랐던 이반 일리치는 법원 동료인 셰베크가 찾아오자 울음을 터뜨리고 다독임을 받기는커녕 곧장 진지하고 엄격하고 고뇌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관성에 따라 상소심 결의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그것을 집요하게 고수했다. 이 거짓,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거짓이야말로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나날을 독살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듯 삶도 점점 더 나빠졌군.’ 그는 생각했다. 저기 뒤쪽, 삶의 시작 부분에 밝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살아가면서 점점 더 새카매지고 어두워지는 속도 역시 점점 더 빨라졌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속도는 반비례로 빨라지는군.’ 이반 일리치는 생각했다. 그러자 가속도가 붙은 채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돌덩어리가 그의 영혼에 쿡 처박혔다. 삶도, 커져만 가는 일련의 고통도 점점 더 빨리 끝으로, 가장 무서운 고통으로 치닫고 있다....

.."끝났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끝난 건 죽음이야.’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것은 더 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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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p.
..7일 만에 막을 내린 쇼와 64년은 새로 찾아온 헤이세이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신기루 같은 해였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범인은 그 쇼와 마지막 해에 일곱 살 소녀를 유괴, 살해한 뒤 헤이세이의 새로운 세상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64는 맹세와 다짐의 기호였다. 이 사건은 헤이세이 원년의 사건이 아니다. 반드시 범인을 쇼와 64년으로 데려와 무릎을 꿇리겠다.

133p.
..뇌는 팔다리와 상의하지 않는다. 팔을 움직이고 싶으면 팔에다, 다리를 움직이고 싶으면 다리에다 움직이라고 신호를 보낸다....

227p.
..‘자네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게.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만나러 가겠네.‘

288p.
...취조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얄팍한 평면도처럼 보였던 피의자가 어떤 순간을 계기로 깊이와 두께를 가진 입체적인 인물로 바뀐다. 종업원과 다른 점은 변화의 순간을 가져오는 게 내연남의 변덕스러운 태도가 아니라 취조관의 계산된 한마디라는 점이다.

319p.
..영혼까지 팔아넘긴 건 아닙니다. 그 뒷말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제 진심이라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면 쳇바퀴 돌듯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그때의 감정에 휩쓸려 형사와 경무 사이를 오가는 것은 자기애와 가족애가 서로를 죽이려 드는 수라장으로 되돌아가는 걸 뜻한다.

338p.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직업이지.‘
..형사라는 직업은 인생에서 투명 망토 같은 역할을 한다. 오사카베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편한 직업이 아니라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형사의 애환과 고뇌는 과잉 공급된 소설과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통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지금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어버렸다. 형사라고 말하면 상대는 어련히 알아듣는다.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게다가 형사는 현실의 고생도, 고뇌도, 슬픔도 쉽게 뒷전으로 미뤄둘 수 있다. 항상 쫓아야 할 사냥감이 있는 까닭이다. 일선 경찰서에 있을 때 마쓰오카는 이런 말로 부하들을 다독였다. "불평하지 말고 즐겨라. 우리는 사냥도 하고 돈도 받을 수 있으니까."

461p.
.."주인장의 말로는 사고 당일 메이카와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며칠 전에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자동응답기에 불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메시지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다. 최근에는 판촉 전화나 잘못 걸린 전화도 오지 않아서, 전화벨이 울리는 일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옛날 전화기라 발신자 표시 기능도 없었다. 누굴까? 누가 전화했을까?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은 그 모습이 전에 없이 기뻐 보였다고 했다."
..본인에게는 중요한 일. 적힌 모든 내용이 그러했다.

571p.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하면 노트를 넘기는 소리조차 박력을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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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7p. «상춘곡»
..그리고 곧 나는 알게 됩니다. 그것이 멀리서 당신이 오고 있는 소리이며 색깔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이 절 마당에 들어서자 그 연둣빛의 소리는 감쪽같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빛과 소리라는 말은 어쩌면 <멀리>라는 뜻에서 온 것이 아닐는지요.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나는 그게 당신이란 걸 금방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야흐로 봄이 막 시작됐다는것을 뜻하는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55~56p. «상춘곡»
..오늘 벚나무 길에서 보니 며칠 안짝이면 꽃망울이 터질 듯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처럼 꽃을 보러 온 이를 만나 만세루 얘기를 들은 것은 참으로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그날 내가 보았듯이, 벚꽃도 불탄 검은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그게 당장일 리는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71~72p. «3월의 전설»
...그녀는 단 한 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또 읽어야 하는 생을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한데 한 권밖에 없는 책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읽어 왔다고 생각해 보라. 고약한 것은 그것만으로도 생이 어떻든 가능하고 마침내 그게 생의 전부가 돼 버린다는 것이다.

124p. «빛의 걸음걸이»
..휴일의 공원에서 웬 낯 모르는 사람이 쥐어 주고 간 고무풍선을 얼결에 받아들고 무려 10년이나 꼼짝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누나는 지나온 세월을 단순하게 요약했다. 한데 공원 문을 닫을 때가 되자 어디선가 불쑥 주인이 나타나 풍선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141p. «은항아리 안에서»
...나는 이제 누군가 나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한다. 지쳐서가 아니다. 매양 헛것에 쫓겨 기어이 떠나게 돼도 거기서 또 번번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보다 더욱 낯설고 시막이 아득했다.

191p. «천지간»
..여자는 광주에서 왜 자신을 따라왔냐는 말은 끝내 묻지 않았다. 그렇게는 차마 물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에겐 흔히 상대적인 진실이란 게 있어서 서로가 터놓고 얘기하지 않으면 끝내 밝혀지지 않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요컨대 이쪽 마음을 숨기고 있는 마당에는 저쪽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제 마음의 정체까지 모르고 있다면 정녕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 또한 여자에게 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가, 라는 식으로 물어 볼 수가 없었다.

215p.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그 동안 책상서랍에 깊숙이 처박아두었던 생(生)이라는 걸 꺼내 한번 반추해 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는 순간 생은 곧 소금 덩어리로 변한다는 걸 알게 된다.

297p. «에스키모 왕자»
.."중국 위진시대에 행산(行散) 혹은 행락(行樂)이라고 하는 풍습이 유행했다고 해. 오석산(五石散)이라는 일종의 마약을 먹고 그 약 기운을 발산하기 위하여 산이나 들판을 헤매고 다니는 일이었다지. 순전히 놀이로써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겠지. 그 일을 하는 사람한테는 나름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란 얘기야. 그렇게 밖으로 나가 아주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그 시절엔 많았다고 해."

344p. 해설
..인상주의가 회화에 가져온 혁명은 인간이 그 존재의 시간적 성격을 자각하는 일련의 사건들 중 하나이다. 인간은 이렇게 시간 속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시간 속에서 변화 생성, 그리고 소멸하는 스스로의 운명을 인식한다. 그래서 윤대녕의 붓질에는 인상주의 화가 특유의 우수가 깃들여 있다.

364p. 해설
..그러나 여행의 목적이 구도나 사랑처럼 제아무리 고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뒤에는 반드시 사회적 조건이 숨어 있는 법이다. 작가는 스스로 선택한 직업이지만 동시에 사회의 산물이다. 이제 작가는 풍족하게건 가난하게건 작가라는 그 직업 자체로 독립적 존재가 되었다. 이 같은 독립은 그를 다른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그는 소설을 쓰는 것만으로 살아간다. 이 독립은 자유인 동시에 소외다. 윤대녕의 인물들은 그 자유와 소외, 그리고 거기에 따른 고독, 그리고 어느 정도의 허구성과 주변성을 노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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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있어 산책은 교육의 장이었다. 그녀는 읽을 줄 아는 사람들조차 학교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글에 의해 통제되거나 억압되지 않은 본능으로, 그녀는 자신이 본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고 함축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가구나 장식품, 텔레비전 같은 사물들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물건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유니스는 커버데일 가족에게는 쌀쌀맞게 대했지만, 사물은 그녀로 하여금 이제껏 느꼈던 감정 중 가장 따뜻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다 커버데일 가족을 특별히 더 냉정하게 대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대로 그들을 대할 따름이었다.

..커버데일 가족은 참견꾼들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려는 선의를 품고 다른 사람 일에 끼어들었다. 타인에 대한 품평을 양해해 준다면, 자일즈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들은 자일즈가 본능적으로 아는 사실, 이기심이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방식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임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거실에 있는 컬러텔레비전을 사용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 텔레비전은 제대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물건이었다. 유니스 파치먼이라는 인간의 흥미로운 특성은, 비록 살인이나 협박은 주저하지 않았어도, 물건을 훔치거나 주인의 허락 없이 무언가를 빌린 적이 평생 동안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물이란 인생처럼 특정 사람에게 귀속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유니스는 조지만큼이나 사물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니스는 결코 사람들을 다룰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들이 내리는 가정과 결론을 알아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결점이 탄로 나기 직전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결점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그러한 생각에 지배되어, 실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오해하고 말았다....

...알 수 없는 어떤 작용에 의해, 유니스의 머릿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활자로 바뀌어 버렸다. 그들은 책꽂이에 꽂혀 있는 존재이자, 흰 종이 위에 군데군데 박힌 검은 존재였다. 유니스가 증오했던 동시에 갈망해 마지않았던, 그녀의 영원한 적.

..먼지, 재, 낭비, 욕망, 폐허, 절망, 광기, 죽음, 교활함, 우행, 말, 가발, 넝마, 양피지, 약탈, 판례, 은어, 헛소리, 사기꾼 같은 이름을 한 새들이 날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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