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7p. «상춘곡» ..그리고 곧 나는 알게 됩니다. 그것이 멀리서 당신이 오고 있는 소리이며 색깔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이 절 마당에 들어서자 그 연둣빛의 소리는 감쪽같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빛과 소리라는 말은 어쩌면 <멀리>라는 뜻에서 온 것이 아닐는지요.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나는 그게 당신이란 걸 금방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야흐로 봄이 막 시작됐다는것을 뜻하는 소리이기도 했습니다.
55~56p. «상춘곡» ..오늘 벚나무 길에서 보니 며칠 안짝이면 꽃망울이 터질 듯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나처럼 꽃을 보러 온 이를 만나 만세루 얘기를 들은 것은 참으로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그날 내가 보았듯이, 벚꽃도 불탄 검은자리에서 피어나는 게 더욱 희고 눈부시리라 믿습니다. 물론 그게 당장일 리는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71~72p. «3월의 전설» ...그녀는 단 한 권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또 읽어야 하는 생을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한데 한 권밖에 없는 책을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읽어 왔다고 생각해 보라. 고약한 것은 그것만으로도 생이 어떻든 가능하고 마침내 그게 생의 전부가 돼 버린다는 것이다.
124p. «빛의 걸음걸이» ..휴일의 공원에서 웬 낯 모르는 사람이 쥐어 주고 간 고무풍선을 얼결에 받아들고 무려 10년이나 꼼짝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누나는 지나온 세월을 단순하게 요약했다. 한데 공원 문을 닫을 때가 되자 어디선가 불쑥 주인이 나타나 풍선을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141p. «은항아리 안에서» ...나는 이제 누군가 나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한다. 지쳐서가 아니다. 매양 헛것에 쫓겨 기어이 떠나게 돼도 거기서 또 번번이 다른 곳으로 떠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돌아오는 길은 가는 길보다 더욱 낯설고 시막이 아득했다.
191p. «천지간» ..여자는 광주에서 왜 자신을 따라왔냐는 말은 끝내 묻지 않았다. 그렇게는 차마 물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에겐 흔히 상대적인 진실이란 게 있어서 서로가 터놓고 얘기하지 않으면 끝내 밝혀지지 않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요컨대 이쪽 마음을 숨기고 있는 마당에는 저쪽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제 마음의 정체까지 모르고 있다면 정녕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 또한 여자에게 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는가, 라는 식으로 물어 볼 수가 없었다.
215p.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 ...그 동안 책상서랍에 깊숙이 처박아두었던 생(生)이라는 걸 꺼내 한번 반추해 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는 순간 생은 곧 소금 덩어리로 변한다는 걸 알게 된다.
297p. «에스키모 왕자» .."중국 위진시대에 행산(行散) 혹은 행락(行樂)이라고 하는 풍습이 유행했다고 해. 오석산(五石散)이라는 일종의 마약을 먹고 그 약 기운을 발산하기 위하여 산이나 들판을 헤매고 다니는 일이었다지. 순전히 놀이로써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겠지. 그 일을 하는 사람한테는 나름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란 얘기야. 그렇게 밖으로 나가 아주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그 시절엔 많았다고 해."
344p. 해설 ..인상주의가 회화에 가져온 혁명은 인간이 그 존재의 시간적 성격을 자각하는 일련의 사건들 중 하나이다. 인간은 이렇게 시간 속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시간 속에서 변화 생성, 그리고 소멸하는 스스로의 운명을 인식한다. 그래서 윤대녕의 붓질에는 인상주의 화가 특유의 우수가 깃들여 있다.
364p. 해설 ..그러나 여행의 목적이 구도나 사랑처럼 제아무리 고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뒤에는 반드시 사회적 조건이 숨어 있는 법이다. 작가는 스스로 선택한 직업이지만 동시에 사회의 산물이다. 이제 작가는 풍족하게건 가난하게건 작가라는 그 직업 자체로 독립적 존재가 되었다. 이 같은 독립은 그를 다른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든다. 그는 소설을 쓰는 것만으로 살아간다. 이 독립은 자유인 동시에 소외다. 윤대녕의 인물들은 그 자유와 소외, 그리고 거기에 따른 고독, 그리고 어느 정도의 허구성과 주변성을 노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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