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p.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76~138)와 관련된 재미난 일화도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공중목욕탕에서 목욕 중벽에 등을 문지르는 늙은 퇴역군인을 목격했다. 그는 때를 밀어주는 사람에게 지불할 돈이 없어 혼자서 등을 밀고 있었다. 황제는 그가 안타까워 돈과 노예를 내렸다. 이 소식이 퍼지자 다음 날 많은 시민들이 그 목욕탕으로 몰려와 황제 앞에서 벽에 등을 문질렀다. 찾아온 모든 이들에게 돈과 노예를 하사해야 할까? 황제는 현명하게도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 서로 등을 밀어주도록 했다. 이 일화는 공중목욕탕이 신분 차이를 넘어선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34p.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121~180)는 『명상록Meditations』에서 "목욕이 당신의 마음에다 무엇을 선사하느냐? 기름, 땀, 먼지, 기름이 뜨는 물, 그리고 구역질 나는 모든 것을 선사할 뿐이다. 어느 분야든 인생은 바로 그런 것이고 인생에서 모든 물질적인 것은 그러한 것이다." 라고 물질문명의 추함에 목욕을 빗대었다.
37p. ..초기 기독교에서 금욕주의는 보편적이지 않았지만, 3세기와 4세기를 거쳐 점차 확산되었고, 수도승, 성인들은 씻지 않음으로써 육체적 고행을 자처했다. 목욕으로 획득하는 신체적 쾌락을 포기함으로써 얻는 더러움은 성스러움의 증표였는데, 이러한 고행은 ‘씻지 않은 상태‘라는 뜻의 알로우시아alousia라고 한다. 목욕 문화가 가장 발달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살았던 성녀 아그네스Saint Agnes(291~304)는 박해로 사망하는 13살까지 단 한 번도 몸을 씻지 않았다.
128~129p.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백마는 사라지고 자줏빛 알만 남아 있었다. 알을 깨자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사람들은 그 아기를 동천東泉에 씻겼다. 아이를 씻기자 몸에서 빛이 났다. 천지가 진동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췄다. 해와 달마저 밝게 빛났다. 사람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 짓고 하늘이 내려준 왕으로 여겨 모셨다. ..같은 날 사량리의 알영 우물가에 용이 나타났다. 닭을 닮은 용은 왼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고 사라져 버렸다. 아기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입술은 닭의 부리와 같았다. 아기를 월성 북쪽의 냇물로 데려가 씻기니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두 아이는 함께 자라 13세에 혼인했다. 박혁거세와 그의 부인 알영의 탄생 이야기로 신라의 건국 신화이다.
140p. ..신통력을 가진 이가 접촉한 물로 몸을 씻으면 그 신통력이 몸을 씻은 자에게도 옮아 영향을 발휘한다는 감염주술적 사고이다. 예를 들어, 사고를 당한 사람의 옷가지에 닿고 싶지 않은 마음, 아이를 원하는 여성이 다른 산모가 입었던 치마를 입는 옛 풍속이 이와 같은 관념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믿음은 신라 시대에도 있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관세음보살을 목욕시키자 그 물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두 사람은 그 물로 목욕했고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성불했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일화다. 이처럼 목욕물의 신비한 효능에 대한 믿음은 절박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83~184p.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도 또 다른 목욕 날이다. 음력 보름과 그믐에 물이 가장 많이 차오르는 때를 한사리라고 하는데, 백중에 일어나는 한사리를 백중사리라고 부른다. 이날은 연중 물살이 가장 센 날로, 여름 물과 겨울 물이 바뀌는 시기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때의 물은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된다고 믿었다. ..칠석과 백중에 목욕하는 풍속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칠석날의 목욕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남부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백중 목욕은 제주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반면 한반도 중부 이북 지역에서는 백중이 지나면 날씨가 선선해져서 야외에서 대대적으로 목욕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안에서는 "백중에 바다 미역 하면 물귀신이 된다"라는 경고성 속담도 전해진다. 이는 백중사리 때의 물살이 유난히 세기 때문에 안전이 우려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85p. ..50년 전에 목욕료는 ‘준 공익성 있는 요금‘으로 인식되었다. 찬 바람이 부는 계절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사회적으로 모두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저렴한 비용으로 목욕할 수 있는 공중목욕탕이 여전히 필요하다.
317p. ..비누는 순우리말이다. 조선시대 콩, 팥, 녹두를 맷돌에 갈아 몸을 씻거나 빨래에 비벼서 때를 빼는 데 사용했는데 이것을 ‘비노‘라고 불렀다.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1677)에 실린 예문, "비노 잇냐 날을 주어 머리 게라.(비누 있느냐? 나에게 주어 머리 감게 해라.)"이 비누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형태의 비누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라 해서 ‘양비누‘, 잿물을 돌처럼 굳혀 만든 것이라 잿물 ‘감鹼‘자를 써서 ‘석감‘이라 불렀다.
353p. ..이후로 버려진 목욕탕 건물을 기반으로 한 상업 시설이 전국에 등장했다. 서울 마포구의 행화탕, 대구 중구의 문화장, 청주 상당구의 학천탕 등은 공중목욕탕을 콘셉트로 한 카페로 변신했다. 강원도 춘천에는 목욕탕이 폐업한 자리에 문을 연 정육식당이 있어, 탕 안에 테이블을 두고 벽에 설치된 턱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는다. 부산진구의 미성탕은 파스타집으로 재탄생해 성업 중이다. 이렇게 다양한 변신을 거친 공간들은 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새로운 장소로, 오래된 건물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목욕탕 건물이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 복합 문화시설로 재탄생하는 사례도 증가한다. 전라북도 군산의 영화빌딩은 1969년에 지어진 건물로, 1층은 90평 규모의 공중목욕탕이었고, 2층부터 4층까지는 국제 선원들을 맞이하는 20여 개의 객실이 있는 숙박 시설이었다. 2008년에 문을 닫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이 건물에는 미술관이 들어섰다. 이당미술관은 하늘색과 흰색 타일, 천장을 지나가는 배관 등 목욕탕 흔적을 그대로 유지했다. 심지어 처음 전시가 시작될 때는 목욕탕이 다시 영업하는 줄 알고 목욕 가방을 챙겨온 동네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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