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린생활자»
..그런데 이렇게 창문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 창틀에 두어 개의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그는 아깝다는 생각보다 감동스러웠다. 그건 바로 이 집이 ‘자신의’ 집이기 때문이었다. 상욱은 자기 집이라 아까워서 못을 박지 못하는 것과 남의 집이라 못 박는 게 꺼려졌던 것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었다. 더 편하고 안락하게 살기 위해 에어컨을 설치한다는 것은, 집주인으로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당당함과 자부심과 감동을 주는 두 개의 구멍 따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소원은 통일»
...나중에 알고 보니 연주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 1번 프렐류드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앞에서 러시아의 한 첼리스트가 연주했던 곡이라 했다....

«소원은 통일»
...돈푼 깨나 있는 자린고비가 되는 것이, 주식 투자로 돈이나 날려버린 한심한 아비가 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아비 무서운 줄 알아야 하니 죽는 순간까지 자식에겐 돈 한 푼 주지 않을 거라 주변에다 떠들어대곤 했다.

«소원은 통일»
..퇴사 후 적적한 마음에 기원을 드나들었고 거기서 만난 김 위원을 따라 광화문엘 처음 갔다. 그곳에 있으니 세상만사 우습게 보였다. 더 이상 뒷방 퇴물 같지 않았다. 혐오감을 담았다는 것도 알았지만 차라리 겁먹은 듯한 젊은이들의 눈빛이, 이젠 바랄 수조차 없는 존경심 어린 눈빛을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싶었다. 듣다 보면 구구절절 옳은 연사들의 연설과 또래 노인들의 자신감 넘치는 대화도 속을 시원케 했다. 하루하루 늙어갔지만 명석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것»
.."큰 죄를 덮기 위해선 작은 죄를 곁에 둬라."
..아버지는 어린 그를 가르쳤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사는 그렇게 돌아갔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자의 죄를 덮기 위해 별거 아닌 이들의, 벌거 아닌 죄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자극적인 연예인 스캔들이 터지고, 꼬리나 깃털에도 못 미치는 이들의 작은 죄가 요란하게 주목받았다. 그래야 실세는 안전한 곳에서 웃을 수 있었다....

«삿갓조개»
..처음 일을 시작한 몇 달 동안 그는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고통스러우며 질긴 것이 숨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청소기의 혁명»
..그는 최 회장의 아들인 최 사장이 했던 말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먼지 망이 화분이 되어 꽃을 피우게 한다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망상이었다. 화분이 있는데 굳이 먼지 망에서 꽃을 피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피어난 꽃은 무어란 말인가. 흙에서 자라도 될 꽃을 굳이 먼지 망에서 키우겠다는 악취미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생각이었을까.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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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p. «나의 부모와 아이들»
...내 아내와 아이들이 살던 진짜 집, 한때 나의 것이기도 했던 집을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물건은 별로 없고 정리가 잘되어 있어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옷걸이를 옆으로 제쳐본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67p.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숨소리»
..그 목록은 어떤 계획의 일부였다. 롤라는 자신이 지나치게 오래 산 데다, 삶이 너무 단순하고 하찮아서 이제 사라질 수 있을 만큼의 무게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롤라는 아는 이들의 경험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아무리 노년기라도 죽으려면 치명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감정적으로 타격을 받든, 육체적으로 타격을 받든 간에. 그런데 롤라는 자신의 육체에 그 어떤 치명타도 가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죽고 싶었지만, 매일 아침 여지없이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반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든 일을 그런 방향으로 계획하면서, 자신의 삶을 무디어지게 하고 삶의 공간을 서서히 줄여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148p.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숨소리»
...그녀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으려면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했고, 그의 이름은 몇 미터 앞 상자에 붙어 있는 자기 아들의 이름이기도 했다. 하지만 심연은 이미 열려 있었고, 말과 사물은 이제 빛과 더불어 전속력으로 그녀의 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159p. «40제곱센티미터의 공간»
...그녀는 30달러를 손에 쥐고 가게를 나왔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했다. 택시를 탈 돈도 있었고 주소도 잊지 않았던 데다 달리 할 일도 없었지만, 도저히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길모퉁이로 가서 금속 벤치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을 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떤 결론을 내릴 수도, 내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몸이 알아서 하는 대로, 보는 일과 숨 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무한한 시간이 순환하고 흐르면서 버스가 왔다가 갔다. 정류장은 텅 비었다가 다시 채워지기를 반복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물건을 가방이나 지갑에 넣어두었고, 팔에 끼고 있거나 손에 들고 있는가 하면 두 발 사이 땅바닥에 내려놓기도 했다. 그들은 거기 선 채로 자기 물건을 간수하고 있었고, 그 대가로 물건들은 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176p. «운 없는 남자»
...하지만 왠지 탈의실에 혼자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혼자 들어가기도 싫었지만, 혼자 들어가서 입어보고 나왔는데 아무도 없는 것이 더 두려웠다.

191p. «외출»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기분이 아주 좋아. 이 모든 것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대체 그건 어떤 것일까? 나는 생각해본다. 잘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기억하고 되풀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필요할 경우 다시 이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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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p.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76~138)와 관련된 재미난 일화도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공중목욕탕에서 목욕 중벽에 등을 문지르는 늙은 퇴역군인을 목격했다. 그는 때를 밀어주는 사람에게 지불할 돈이 없어 혼자서 등을 밀고 있었다. 황제는 그가 안타까워 돈과 노예를 내렸다. 이 소식이 퍼지자 다음 날 많은 시민들이 그 목욕탕으로 몰려와 황제 앞에서 벽에 등을 문질렀다. 찾아온 모든 이들에게 돈과 노예를 하사해야 할까? 황제는 현명하게도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 서로 등을 밀어주도록 했다. 이 일화는 공중목욕탕이 신분 차이를 넘어선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34p.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121~180)는 『명상록Meditations』에서 "목욕이 당신의 마음에다 무엇을 선사하느냐? 기름, 땀, 먼지, 기름이 뜨는 물, 그리고 구역질 나는 모든 것을 선사할 뿐이다. 어느 분야든 인생은 바로 그런 것이고 인생에서 모든 물질적인 것은 그러한 것이다." 라고 물질문명의 추함에 목욕을 빗대었다.

37p.
..초기 기독교에서 금욕주의는 보편적이지 않았지만, 3세기와 4세기를 거쳐 점차 확산되었고, 수도승, 성인들은 씻지 않음으로써 육체적 고행을 자처했다. 목욕으로 획득하는 신체적 쾌락을 포기함으로써 얻는 더러움은 성스러움의 증표였는데, 이러한 고행은 ‘씻지 않은 상태‘라는 뜻의 알로우시아alousia라고 한다. 목욕 문화가 가장 발달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살았던 성녀 아그네스Saint Agnes(291~304)는 박해로 사망하는 13살까지 단 한 번도 몸을 씻지 않았다.

128~129p.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백마는 사라지고 자줏빛 알만 남아 있었다. 알을 깨자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사람들은 그 아기를 동천東泉에 씻겼다. 아이를 씻기자 몸에서 빛이 났다. 천지가 진동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췄다. 해와 달마저 밝게 빛났다. 사람들은 그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 짓고 하늘이 내려준 왕으로 여겨 모셨다.
..같은 날 사량리의 알영 우물가에 용이 나타났다. 닭을 닮은 용은 왼쪽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고 사라져 버렸다. 아기의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입술은 닭의 부리와 같았다. 아기를 월성 북쪽의 냇물로 데려가 씻기니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두 아이는 함께 자라 13세에 혼인했다. 박혁거세와 그의 부인 알영의 탄생 이야기로 신라의 건국 신화이다.

140p.
..신통력을 가진 이가 접촉한 물로 몸을 씻으면 그 신통력이 몸을 씻은 자에게도 옮아 영향을 발휘한다는 감염주술적 사고이다. 예를 들어, 사고를 당한 사람의 옷가지에 닿고 싶지 않은 마음, 아이를 원하는 여성이 다른 산모가 입었던 치마를 입는 옛 풍속이 이와 같은 관념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믿음은 신라 시대에도 있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관세음보살을 목욕시키자 그 물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두 사람은 그 물로 목욕했고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성불했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일화다. 이처럼 목욕물의 신비한 효능에 대한 믿음은 절박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83~184p.
..음력 7월 15일 백중百中도 또 다른 목욕 날이다. 음력 보름과 그믐에 물이 가장 많이 차오르는 때를 한사리라고 하는데, 백중에 일어나는 한사리를 백중사리라고 부른다. 이날은 연중 물살이 가장 센 날로, 여름 물과 겨울 물이 바뀌는 시기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이때의 물은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된다고 믿었다.
..칠석과 백중에 목욕하는 풍속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칠석날의 목욕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남부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백중 목욕은 제주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반면 한반도 중부 이북 지역에서는 백중이 지나면 날씨가 선선해져서 야외에서 대대적으로 목욕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서해안에서는 "백중에 바다 미역 하면 물귀신이 된다"라는 경고성 속담도 전해진다. 이는 백중사리 때의 물살이 유난히 세기 때문에 안전이 우려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85p.
..50년 전에 목욕료는 ‘준 공익성 있는 요금‘으로 인식되었다. 찬 바람이 부는 계절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은 사회적으로 모두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저렴한 비용으로 목욕할 수 있는 공중목욕탕이 여전히 필요하다.

317p.
..비누는 순우리말이다. 조선시대 콩, 팥, 녹두를 맷돌에 갈아 몸을 씻거나 빨래에 비벼서 때를 빼는 데 사용했는데 이것을 ‘비노‘라고 불렀다.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1677)에 실린 예문, "비노 잇냐 날을 주어 머리 게라.(비누 있느냐? 나에게 주어 머리 감게 해라.)"이 비누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형태의 비누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라 해서 ‘양비누‘, 잿물을 돌처럼 굳혀 만든 것이라 잿물 ‘감鹼‘자를 써서 ‘석감‘이라 불렀다.

353p.
..이후로 버려진 목욕탕 건물을 기반으로 한 상업 시설이 전국에 등장했다. 서울 마포구의 행화탕, 대구 중구의 문화장, 청주 상당구의 학천탕 등은 공중목욕탕을 콘셉트로 한 카페로 변신했다. 강원도 춘천에는 목욕탕이 폐업한 자리에 문을 연 정육식당이 있어, 탕 안에 테이블을 두고 벽에 설치된 턱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는다. 부산진구의 미성탕은 파스타집으로 재탄생해 성업 중이다. 이렇게 다양한 변신을 거친 공간들은 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새로운 장소로, 오래된 건물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목욕탕 건물이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 복합 문화시설로 재탄생하는 사례도 증가한다. 전라북도 군산의 영화빌딩은 1969년에 지어진 건물로, 1층은 90평 규모의 공중목욕탕이었고, 2층부터 4층까지는 국제 선원들을 맞이하는 20여 개의 객실이 있는 숙박 시설이었다. 2008년에 문을 닫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이 건물에는 미술관이 들어섰다. 이당미술관은 하늘색과 흰색 타일, 천장을 지나가는 배관 등 목욕탕 흔적을 그대로 유지했다. 심지어 처음 전시가 시작될 때는 목욕탕이 다시 영업하는 줄 알고 목욕 가방을 챙겨온 동네 주민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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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다는 왜 이렇게까지 사람을 멀리하려 드는 걸까.
..단순히 인간 혐오 때문이 아니다.
..살아서 하는 모든 행위가 ‘놀이’라는 뜻이다――.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걸까. 아니면 애초에 자신의 인생 자체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떤 인생을 경험해야 그런 애처로운 마음에 도달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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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기 위해 뭘 할지 생각하는 것은 머리지만, 무엇을 위해 살아갈지를 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전쟁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한데 전쟁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해 봐.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전 세계 인구는 지금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테고, 그렇게 되면 식량과 자원, 사람이 살 곳도 지구에서 벌써 오래전에 없어졌겠지.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신들의 목을 조르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신이 ‘사람은 사람을 죽인다’라는 기능을 부여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불행한 인간을 조금 행복하게 하고 행복한 인간을 조금 불행하게 한다――.
..무로이는 그 말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신이 조화를 부리듯 범죄를 이용해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무로이는 어떤 의미에서 범죄라는 수단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바꾸려 하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렇다면 그 일의 한 부분을 맡고 있는 아마미야 일행은 ‘신의 아이’인 셈이다――.

.."고통이나 아픔이라는 건… 자신이 어느 정도 행복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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