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p. «나의 부모와 아이들»
...내 아내와 아이들이 살던 진짜 집, 한때 나의 것이기도 했던 집을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물건은 별로 없고 정리가 잘되어 있어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옷걸이를 옆으로 제쳐본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67p.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숨소리»
..그 목록은 어떤 계획의 일부였다. 롤라는 자신이 지나치게 오래 산 데다, 삶이 너무 단순하고 하찮아서 이제 사라질 수 있을 만큼의 무게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롤라는 아는 이들의 경험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아무리 노년기라도 죽으려면 치명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감정적으로 타격을 받든, 육체적으로 타격을 받든 간에. 그런데 롤라는 자신의 육체에 그 어떤 치명타도 가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죽고 싶었지만, 매일 아침 여지없이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반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든 일을 그런 방향으로 계획하면서, 자신의 삶을 무디어지게 하고 삶의 공간을 서서히 줄여 완전히 사라지게 만드는 것밖에 없었다....

148p.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숨소리»
...그녀는 죽지 않을 것이다. 죽으려면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했고, 그의 이름은 몇 미터 앞 상자에 붙어 있는 자기 아들의 이름이기도 했다. 하지만 심연은 이미 열려 있었고, 말과 사물은 이제 빛과 더불어 전속력으로 그녀의 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159p. «40제곱센티미터의 공간»
...그녀는 30달러를 손에 쥐고 가게를 나왔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했다. 택시를 탈 돈도 있었고 주소도 잊지 않았던 데다 달리 할 일도 없었지만, 도저히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길모퉁이로 가서 금속 벤치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을 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어떤 결론을 내릴 수도, 내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몸이 알아서 하는 대로, 보는 일과 숨 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무한한 시간이 순환하고 흐르면서 버스가 왔다가 갔다. 정류장은 텅 비었다가 다시 채워지기를 반복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물건을 가방이나 지갑에 넣어두었고, 팔에 끼고 있거나 손에 들고 있는가 하면 두 발 사이 땅바닥에 내려놓기도 했다. 그들은 거기 선 채로 자기 물건을 간수하고 있었고, 그 대가로 물건들은 그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176p. «운 없는 남자»
...하지만 왠지 탈의실에 혼자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혼자 들어가기도 싫었지만, 혼자 들어가서 입어보고 나왔는데 아무도 없는 것이 더 두려웠다.

191p. «외출»
...지금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기분이 아주 좋아. 이 모든 것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대체 그건 어떤 것일까? 나는 생각해본다. 잘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기억하고 되풀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필요할 경우 다시 이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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