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p.
...극장에서 나와 홀로 거리를 걷다가 처마밑에서 소나기가 그치길 기다리며 맡았던, 어느 가게의 생선구이 냄새. 뺨에 닿았던 습기의 감촉과 와아아 떨어지던 빗소리. 살아 있다는 감각과 동시에 찾아오던 이미 너무 늙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 아,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기억들은 어째서 이렇게나 생생할까?

265p.
...나는 무엇이든 선택을 할 때면 그 대가로 미래를 지불해야 하는 줄 몰랐던 날들이 이미 가마득히 멀어졌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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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p.
...나만의 쇼핑이 그냥 커피라면 남 쇼핑 시키기는 티오피랄까. 누군가와 함께하는 소비는 내 돈이 헛되지 않았다는 믿음의 방증이자 헛된 돈이라도 함께 헛될 수 있다는 안정감의 상징이다.

78p.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만의 잠옷에 기꺼이 투자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고 하였나. 잠옷 사기는 곧 새로운 취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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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p.
.."그렇지 않아. 네 사정을 설명했더니 ‘어머, 부러워라. 나도 숨듯이 살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라고 말했거든...."

115p.
.."그러게요, 중년의 나이에 뭔가를 새로 시작하려고 할 때에는 어딘가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어물어물 계획이 흐트러진다니까."
..확실히 그렇긴 하다. 특히 교코 자신은 아무런 제약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물러설 수 없는 일 하나쯤 있어도 괜찮다. 그게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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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p.
..엄마 사진을 보면서 고향의 밤이 깊어간다. 앨범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따라오는 엄마의 해설을 응, 응, 하고 듣다 보면 도쿄에서 한 시간 코스 발 마사지를 받을 때보다 더 편안해진다.
..이럴 때 나는 엄마가 좀 부럽다. 늙어서 내 사진을 찬찬이 들여다봐줄 사람이 나한테는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뭐 그건 그것대로 별수 없지만 옆에서 즐거워하는 엄마를 보면 약간 쓸쓸해진다.

63p.
..엄마와 여행하면 좋은 걸 좋다고 순수하게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한다. 영혼 없는 칭찬도 겉발림도 아닌지라 주위 사람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실은 나도 그런 엄마를 보는 게 좋아서, 조금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내 같이 여행하고 싶어진다.

71p.
..이런 것 저런 것을 먹으면서 어른이 되었다. 뭘 먹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이야기 또한 어른이 됐을 때 마음을 튼튼히 해주는 게 아닐까.

99p.
..언젠가 엄마가 한 말을 떠올리면 번번이 가슴이 먹먹해진다. 엄마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엄마는, 지금은 외동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혼자니까 할머니도 열심히 보살필 수 있어. 형제가 몇이나 된들 누가 모시느냐로 싸우는 집도 있고, 엄마는 혼자라 다행이야."
..그러고는 슬쩍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네도 싸울지도 모르지."
..부모님 병간호 문제로 싸우지 않을까 걱정이나 시키는 우리는 불효녀 자매다.
.."그럴 일 없어, 내가 다 할 거니까"라고 선언하는 게 어쩐지 위선 같아서 나는 그때 그저 묵묵히 있었다.
..할머니 장례식 때 엄마는 많이 울었다. 많이 울었지만, 할 일을 다 했다는 뿌듯한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146~147p.
..동물을 살뜰히 보살피는 엄마를 보면서 어린 나는 늘 안심했다.
..엄마의 사랑이 작은 동물들에게 향하는 게 기뻤다.
..왜 그랬을까?
..그때 나는 알았을 터다. 알았다고 할까, 절로 느꼈다고 할까.
..기니피그며 병아리며 비둘기며 다람쥐며.
..그 애들을 엄마가 아무리 예뻐한들 그보다 몇 갑절에 몇 갑절 나를 좋아한다는 걸. 지금 다정하게 기니피그를 쓰다듬는다 한들 엄마한테는 뭐니뭐니 해도 두 딸이 제일 귀하다는 걸.
..아이는 조그만 머리로 수시로 확인하려 든다.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언제나 알고 싶어한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둥지에서 떨어진 쇠약한 새끼 제비를 엄마가 주워 온 적이 있었다. 수건으로 따듯하게 감싸고 모이를 먹였지만 끝내 살리지 못했다. 새끼 제비 한 마리 때문에 우는 엄마를 보면서,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묵직한 일인지 나는 천천히 배웠던 게 아닐까.

157p.
..엄마와의 추억, ‘잘 기억하시네요‘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럴 때면 내가 ‘잊어버린‘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극히 일부다. 그 너머에는 아낌없이 쏟아졌을 엄마의 사랑이 조용히 잠들어 있다. 하나하나 확인하지 못해도 내 맘 깊숙이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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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p.
..이것은 나만의 착각일지 모른다. 그것은 바로, 길에서 개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면서 상대의 마음을 헤아렸다고 느끼는 것 말이다. 나나 개나 서로 바라보다 그대로 지나칠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 정말이지 뭔가를 이해한 듯한 느낌이 들어 알 수 없는 만족감을 느낀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개를 불러 세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개가 나에게 꼬리를 흔들어 보인다면, 둘 사이에는 위선적인 감정이, 서로가 상대를 기쁘게 하려는 잔꾀가 적잖이 생기고 만다. 그것도 나름대로 흐뭇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경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가식적인 행위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정말로 개를 좋아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53~54p.
..개뿐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생각도 완전히 마찬가지였다. 가문이니 유서니 혈연 같은 것을 중요시하여 그것으로 결혼 상대를 고르는 사람을 많이 보지만, 그때마다 나는 "실없기는" 하고 만다. 그들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하다. 세상에서는 당당한 지식층으로 통하는 인물조차, 다른 사람 앞에서는 허울 좋은 말만 늘어놓는 교양인조차, 어느 날 갑자기 그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잣대를 무서운 기세로 휘두르는 것이다. ‘혈통‘이니 뭐니 하는 것을 누가 보여 주면 지금까지의 평가를 180도 바꾸어 버리는 사람도 많다. 너무나 어리석은 탓이다. 그들에게는 그 당사자가 어떤 인물인지를 간파할 눈이 없다. 그래서 아무 상관도 없는 장식물의 질이나 수로 가늠하려고 한다. 그것은 타산과도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혼 등의 경우에는 불행한 결혼을 야기하는 큰 원인이 되기도 한다.

141~142p.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다르다. 식욕이 채워지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거니와, 식사를 할 때에 감사해 하거나 식사를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를 만큼 기분 좋은 일로 여기지도 않는 것 같다. 그들은 공복을 느끼기 전에 음식이 위로 들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날들이 영원히 계속되리라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욕망은 애석하게도 물욕에서 시작된다. 식욕은 저절로 한계가 그어지는 데 반해(아무리 부자라도 위는 하나니까) 물욕은 끝이 없는 것이다.

159p.
..그 무렵 나는 대인관계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 스스로가 완벽한 인간이 아닌 이상, 친구와 지인에게 많은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하나라도 남보다 뛰어난 것이 있으면 충분하고, 그 나머지는 아무리 어설퍼도 상관없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고 너무 점잔 빼는 유형의 사내와는 그다지 친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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