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는 망자들이 항상 그러하듯 과연 망자답게 유달리 묵직하게 누워 있었다. 빳빳하게 굳은 사지는 관 바닥에 푹 잠기고 영원히 젖혀진 머리는 베개에 닿아 있었으며, 여느 망자들처럼 밀랍같이 누런 이마와 움푹 꺼진 관자놀이의 맨살, 윗입술을 짓누를 듯 우뚝 솟은 코를 내놓고 있었다. 그는 표트르 이바노비치가 보지 못한 사이에 더 여위어서 몹시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모든 망자처럼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의미심장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는 해야 할 일을 해냈고 더욱이 제대로 해냈다는 표정이 어리어 있었다. 그 밖에도 아직 살아 있는 자들에 대한 책망이나 무언가를 경고하는 기색이 담긴 표정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자기 권력을 남용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드럽게 표현하려고 애썼다. 바로 이런 권력을 의식하고 그것을 부드러이 부릴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새로운 직책이 주는 흥미와 매력의 핵심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 단장한 집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항상 그렇듯이 아무리 살기 좋은 집이어도 딱 방 한 칸이 부족하기 마련이고, 또 수입이 늘어나도 딱 얼마가, 그러니까 500루블 정도가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참 좋았다. 특히 집 단장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서 뭘 더 사들이고 주문하고 재배치하고 다듬고 손봐야 할 것이 여전히 남아 있던 시절이 참 좋았다....

..이러한 거짓 말고도, 혹은 그 때문에 더더욱 이반 일리치를 괴롭힌 것은 아무도 그가 바라는 만큼 그를 불쌍히 여겨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기나긴 고통을 맛본 뒤에 이반 일리치는 때때로 이렇게 고백하기가 창피스럽지만, 누구든 자기를 아픈 아이처럼 그저 불쌍히 여겨 주길 무엇보다 바랐다. 아이를 어루만지고 달래 주듯 상냥히 쓰다듬고 입을 맞추고 자신을 위해 울어 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턱수염이 허옇게 센 고위 판사에게 아무도 그렇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래 주길 바랐다. 그런데 게라심과 있으면 그 비슷한 뭔가를 느꼈고, 그와의 관계에서 위안을 얻었다. 엉엉 울고 싶고,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울어 주고 어루만져 주길 바랐던 이반 일리치는 법원 동료인 셰베크가 찾아오자 울음을 터뜨리고 다독임을 받기는커녕 곧장 진지하고 엄격하고 고뇌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관성에 따라 상소심 결의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그것을 집요하게 고수했다. 이 거짓,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거짓이야말로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나날을 독살하는 가장 무서운 독이었다.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듯 삶도 점점 더 나빠졌군.’ 그는 생각했다. 저기 뒤쪽, 삶의 시작 부분에 밝은 점이 하나 있었는데 살아가면서 점점 더 새카매지고 어두워지는 속도 역시 점점 더 빨라졌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속도는 반비례로 빨라지는군.’ 이반 일리치는 생각했다. 그러자 가속도가 붙은 채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돌덩어리가 그의 영혼에 쿡 처박혔다. 삶도, 커져만 가는 일련의 고통도 점점 더 빨리 끝으로, 가장 무서운 고통으로 치닫고 있다....

.."끝났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마음속으로 되풀이했다. ‘끝난 건 죽음이야.’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것은 더 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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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7p.
..우리나라의 옛 마을에는 서원이 있고, 산속엔 절집이 있다. 절집은 아무리 허름해도 온정이 느껴지는데 서원은 아무리 번듯해도 황량감과 황폐감만 감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사실, 사람이 살고 안 살고의 차이이다. 선암서원 대문이 열려 있을 때 촌로들이 거기에 와서 나무토막을 베고 누워 정담을 나눌 때는 지나가다가도 들러보고 싶은 집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문 열고 들어가라고 해도 무서운 집이 되고 말았다.

485p.
..운문사 솔밭은 우리나라에서 첫째는 아닐지 몰라도 둘째는 갈 장관 중의 장관이다. 서산 안면도의 해송밭, 경주 남산 삼릉계의 송림, 풍기 소수서원의 진입로 솔밭, 봉화군 춘양의 춘양목…… 내 아직 백두산의 홍송을 보지 못하여 그 상좌를 남겨놓았지만 남한 땅에 이만한 솔밭은 드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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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271p.
..나는 미륵사탑의 아름다움과 복원된 탑의 미움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그것은 실제로 돌이 죽어 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복원된 탑은 자연석이 아니라 인조석으로 만든 탑처럼 보인다. 돌을 정으로 쪼은 것과 기계로 깎은 것의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낱낱 부재를 이어맞춘다는 것은 돌 하나하나의 성격이 살아 있는 연결이어야 하는데 복원된 것은 마치 긴 돌이 없어서 그랬다는 듯이 낱장 낱장의 성격을 죽여버리니까 이같이 박제된 시체처럼 된 것이다. 그것은 기계만 과신하고 손의 묘를 가볍게 생각한 탓이다. 요즘 유행하는 무덤 앞의 석물들이 옛날 것과 달리 멋도 없고 생경하게 느껴지는 것도 정으로 쪼은 것이 아니라 기계로 깎은 것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형식상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정신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는 공사계획과 견적에 따라 석조물을 복원한다는 생각에서 한 것임에 반하여 백제 사람은 절대자를 모신다는 종교 하는 마음으로 했다는 사실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리라.
..그래도 이 미륵사의 20세기 석탑이 아름답게 보일 때도 있다. 그것은 해 넘어간 어둔 녘 희끄무레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다. 하기야 그런 상태에서는 어떤 여인도 다 괜찮아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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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p.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최초의 의식은 장례식인 거지.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 방식 중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보수성을 보여주는 것이 장례 방식이래요. 그래서 새로운 장례문화를 갖고 있는 집단이 이주해오거나 획기적인 문화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바뀌질 않는 것이 무덤 형식이라는군. 그래서 무덤이 바뀌면 그 문화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야기까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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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p.
..7일 만에 막을 내린 쇼와 64년은 새로 찾아온 헤이세이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신기루 같은 해였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범인은 그 쇼와 마지막 해에 일곱 살 소녀를 유괴, 살해한 뒤 헤이세이의 새로운 세상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64는 맹세와 다짐의 기호였다. 이 사건은 헤이세이 원년의 사건이 아니다. 반드시 범인을 쇼와 64년으로 데려와 무릎을 꿇리겠다.

133p.
..뇌는 팔다리와 상의하지 않는다. 팔을 움직이고 싶으면 팔에다, 다리를 움직이고 싶으면 다리에다 움직이라고 신호를 보낸다....

227p.
..‘자네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주게.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만나러 가겠네.‘

288p.
...취조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얄팍한 평면도처럼 보였던 피의자가 어떤 순간을 계기로 깊이와 두께를 가진 입체적인 인물로 바뀐다. 종업원과 다른 점은 변화의 순간을 가져오는 게 내연남의 변덕스러운 태도가 아니라 취조관의 계산된 한마디라는 점이다.

319p.
..영혼까지 팔아넘긴 건 아닙니다. 그 뒷말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제 진심이라 말할 수도 없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면 쳇바퀴 돌듯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그때의 감정에 휩쓸려 형사와 경무 사이를 오가는 것은 자기애와 가족애가 서로를 죽이려 드는 수라장으로 되돌아가는 걸 뜻한다.

338p.
..‘세상에서 가장 편한 직업이지.‘
..형사라는 직업은 인생에서 투명 망토 같은 역할을 한다. 오사카베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편한 직업이 아니라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형사의 애환과 고뇌는 과잉 공급된 소설과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통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지금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어버렸다. 형사라고 말하면 상대는 어련히 알아듣는다.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게다가 형사는 현실의 고생도, 고뇌도, 슬픔도 쉽게 뒷전으로 미뤄둘 수 있다. 항상 쫓아야 할 사냥감이 있는 까닭이다. 일선 경찰서에 있을 때 마쓰오카는 이런 말로 부하들을 다독였다. "불평하지 말고 즐겨라. 우리는 사냥도 하고 돈도 받을 수 있으니까."

461p.
.."주인장의 말로는 사고 당일 메이카와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며칠 전에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자동응답기에 불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메시지도 녹음되어 있지 않았다. 최근에는 판촉 전화나 잘못 걸린 전화도 오지 않아서, 전화벨이 울리는 일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옛날 전화기라 발신자 표시 기능도 없었다. 누굴까? 누가 전화했을까?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은 그 모습이 전에 없이 기뻐 보였다고 했다."
..본인에게는 중요한 일. 적힌 모든 내용이 그러했다.

571p.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행동을 하면 노트를 넘기는 소리조차 박력을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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