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보다도 여러분, 나의 그 고집스러움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 당신네들이 과연 그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가장 불쾌한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사실은 짓궂은 인간이 못 될뿐더러 세상에 원한을 품을 만한 위인도 아니며, 다만 부질없이 참새 같은 작자들을 혼내주는 것으로 자위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한시도 쉴새없이, 심지어는 무섭게 울화통을 터뜨린 순간에도, 수치감과 함께 자각한다는 바로 그 점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으르렁거리다가도, 만약에 누구든 나한테 장난감 인형 같은 것이라도 내밀든가, 차에 설탕이라도 곁들여 갖다주든가 한다면, 나는 금세 얌전해질 수 있는 그런 인간이란 말이다. 아니, 얌전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속에서부터 환희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 이를 갈듯이 화를 내면서 부끄러움 때문에 몇 달 동안이나 두고두고 불면증에 시달려야 하지만 이게 나의 고질적인 버릇이니 어쩔 수도 없지 않은가. - P-1
..나는 짓궂은 인간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위인이다. 악인도 될 수 없었고 선인도, 비열한도, 정직한 인간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내 방구석에서 최후의 나날을 보내면서 슬기로운 인간은 제정신으론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오직 바보 같은 자들만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뿐이다, 라는 부질없는 자위로 스스로를 우롱하고 있다. 그렇다, 19세기의 인간은 마땅히 정신적인 면에서 무성격적 존재여야 한다. 반면에 성격을 지닌 인간, 즉 실무적인 활동가는 천박한 존재일 수밖엔 없다. 이게 나의 40년에 걸친 지론이다. - P-1
..그건 그렇고, 의젓한 인간이 진심으로 만족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란 도대체 무엇일까? ..답—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그럼 나도 내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다. - P-1
...당신들은 웃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도 유쾌하다. 물론 나의 익살은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데다가 자신감도 없어 보일 테지만,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의식이 발달한 인간이 어찌 자기를 존경할 수가 있겠는가? - P-1
...도대체 문명이 인간 내부의 어떤 성질을 온순하게 만든다는 건가? 문명이란 오직 감각의 다면성을 발달시킬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다면성을 더욱 발달시켜나가면 인간은 아마 유혈 속에서 쾌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 P-1
..그럼 여기서 당신들에게 묻거니와, 이런 기묘한 성질을 타고난 동물인 인간에게 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한 번 시험 삼아 지상의 온갖 행복을 인간의 머리 위에다가 한꺼번에 퍼부어, 행복 속에 풍덩 가라앉아버리게 하여, 그 행복의 표면에 물거품 같은 것이 꾸럭꾸럭 떠오르도록 해보라. 아니면, 인간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경제적 만족을 주어, 실컷 잠이나 자고 꿀떡이나 먹고 세계사의 영속이나 염려하는 따위 일밖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처지에 놓아보라. 그래도 인간은, 오직 배은망덕의 습성 때문에, 더러운 고집 때문에,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야 말 것이다. 꿀떡이 주는 행복조차도 희생할 각오로 자기를 파멸시키는 비경제적이고 바보스러운 넌센스를 기어이 원할 것이다. 그것도 다만 이 분별에 찬 질서정연한 세계에 파멸과 환상의 분자를 혼합시키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공상과 비천하기 짝이 없는 욕망을 언제까지나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인간이다. 결국 그것은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 피아노의 건반은 아니라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데 지나지 않는다. - P-1
..여러분,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의식적인 타성이 가장 좋겠다! 그러니까 지하생활 만세랄 수밖에! 나는 울화통이 터질 만큼이나 정상적인 인간이 부러워 죽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러나 현재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그들이 있는 한, 그들 축에 끼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다(그래도 역시 부러운 건 사실이지만…… 아니다, 아니야, 뭘로 보나 지하 세계 쪽이 훨씬 낫다!) 거기서는 적어도……. 제기랄, 나는 또 허튼소리를 하고 있구나! 허튼소리고말고! 왜냐하면 지하생활이 가장 좋은 건 절대 아니고, 내가 갈망하는 건 뭔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걸 2×2는 4만큼이나 분명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알긴 하면서도 좀처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하생활 같은 건 귀신에게나 줘버려라! - P-1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곤 했다—남들이 자기를 역겨워하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제외하면 다른 누구의 머리에도 떠오르지 않는 것은 대체 어찌 된 일일까?... - P-1
...그는 나의 일생을 통해 변함없는 유일한 친지인데, 나 자신도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나의 공상이 행복의 절정에 달해서, 당장에 세상 사람들, 아니 온 인류를 포옹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시기가 도래했을 때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 한 사람이라도 실재하는 인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안톤 안토노비치한테 가는 것은 면회일로 되어 있는 화요일에 한한다. 따라서 온 인류를 포옹하려는 내적 욕구를 언제나 화요일에 맞춰야만 했다. - P-1
...나의 거처는 곧 나의 은신처이며 나의 껍질이며 나의 상자여서, 나는 그 속에서 온 인류를 피해 숨어 살고 있었다.... - P-1
..그뿐만 아니라, 나는 구석진 곳에 틀어박혀 돈도 없이 모든 현실과 인연을 끊은 채 지하의 세계에서 증오와 원한을 쌓아올리는 것으로 자기의 생활을 소모했다는 등의 얘기를 길게 늘어놔봐야 하나도 재미가 없을 건 뻔한 일이다. 소설엔 주인공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엔 일부러 계획한 것처럼 주인공다운 것과는 정반대되는 성질만을 하나하나 거둬 모아놓지 않았는가. 그리고 첫째로 이런 일은 독자에게 불쾌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두 실생활에서 동떨어져 있어서 생활이란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들 정신적으로 절름발이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멀리 동떨어져버려서 때로는 ‘산 생활’에 대해 일종의 혐오를 느낄 지경이다. 그 때문에 ‘산 생활’을 상기시키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제 병이 고질화되어, 진짜 ‘산 생활’을 마치 무슨 힘든 노동이나 되는 것처럼 느끼며, 차라리 ‘소설식인’ 생활 쪽이 좋다고 모두들 속으로 생각하게끔 되어버린 것이다. - P-1
...우리는 이를테면 생명 없는 사산아, 그것도 살아 있는 아버지한테서 태어난 것이 아닌, 몇 대에 걸친 사산아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점점 우리의 기호에 맞아가는 모양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되도록이면 아버지 아닌 관념에서 인간이 태어나도록 궁리를 하게 될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하자—나는 이제 ‘지하의 세계’에서 글을 쓰기가 싫어졌다. - P-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