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 ...내 생명이 존재하지 않으면 생명 활동이 멈출 우려가 있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경우 ‘내일, 죽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클 겁니다. 생각한다기보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상태가 된다는 게 적절한 표현이겠네요. 그리고 ‘내일, 죽고 싶지 않아.‘라는 상태에 해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인간은 왜 살아야 하나.‘, ‘살아야 할 의미가 도대체 어디 있느냐.‘와 같은 의문을 드러내면, 작년 여름은 더웠다고 말하듯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지." 따위의 말을 할 뿐입니다.
9p. ..저는 제가 너무 끔찍합니다. 그리고 이런 저에게 절대 관심을 품지 않을 타자를 거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탓에 오히려 나를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너무나 허무합니다.
58p. ..야에코는 배고픈 아이가 어렵게 얻은 도넛에 손을 뻗듯 무서운 속도로, 하나씩 그 데이터를 저장했다. 무섭지 않아. 이 사람의 시선은 무섭지 않아. 그날 이후 시선이 무섭지 않은 남자를 처음 만난 것이다. 그 기쁨이 너무나 컸다.
81p. ..야성적인 감으로 살아가는 녀석일수록 자연계에 숨은 부자연스러운 순간에 민감하다.
114p. ..게다가 부모나 뉴스 프로그램의 평론가들이 저토록 관용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미 자기들은 본질적으로 변화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저 공격당하지 않게 받아넘기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단계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118p. ..나쓰키는 자기 방 침대에서 단골 채널들을 순회하고 있을 때면 홀로 숲속 깊은 미지의 호수로 나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감각이 좋았다. 사오리의 커다란 목소리와 뉴스 프로그램의 특집 등 그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허락 없이 다가오는 존재들보다, 다른 사람 몰래 세상을 물리치고 돌진하지 않으면 도착할 수 없는 존재에 닿고 싶다.
170~171p. ..싫어도,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게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마치 저녁 노을빛을 받듯 제멋대로 그 일부에 자신이 포함되어 버리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수학여행, 반드시 찾아오는 밤. 왠지 모르지만 완성되고 마는, 특별한 비밀을 서로 털어 놓기 위해 정비된 공간. 너 말고는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며 마치 특별한 선물을 건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순간. 멋대로 생겨나는 인간관계. 자신을 휘감아 오는 온갖 인연들.
172p. ..딱 한 가지만을 숨기고 있을 뿐인데 그게 모든 인생과 이어져 있어서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게 된다. 이야기는 나눠도 대화할 수는 없다.
215p. ..나쓰키는 생각한다. 이미 말로 표현된, 누군가에게 명명된 고통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 대단한 사고방식이 부럽다고. 당신이 품은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 밝히고 공유하고 동정받을 수 있는 고통이라는 사실이 진심으로 부럽다고.
218p. ..정당한 불만은 생각을 낳고 말을 자아낸다. 출처가 정당하므로 그 논리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논리정연하다. 그래서 더 짜증이 증폭된다.
218~219p. ..성적 대상은, 그저 그것만의 문제가 아니다. 뿌리다. 사고의 뿌리, 철학의 뿌리, 인간관계의 뿌리,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뿌리.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생애의 원천이다. 다수파의 인간은 이 점을 깨닫지 못한다. 깨닫지 못하고 갖고 있는 행복도 알지 못한다. ..타자가 등장하지 않는 인생은, 내가 살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시간은, 정말 공허하다. 그 암흑의 공허함을 누군가 알아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271~272p. ..이 지구에 사는 사람은 모두, 종교가 다르다. 요시미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슬람교나 기독교처럼 이미 이름이 붙어 있는 데만 한정되지 않는다. 무교라고 하는 일본인도 저마다 종교를 가지고 있다. 종교는 돼지고기 멘치가스를 먹는 모습을 보고 맛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될 신성한 동물이라고 생각하는지와 마찬가지로, 예를 들자면 어떤 노래를 듣고 공감하는지 반발하는지,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듣고 시끄럽다고 짜증을 내는지 기운도 좋다며 흐뭇해하는지, 그런 일상의 사소한 장면에서 생긴다. ..사람은 그렇게 체내에 구축된 종교가 겹치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누군가의 생존을 기원한다. 심신의 건강을 바란다. 그것은 살아 있길 바라는 마음을 뛰어넘는 곳에 있다. 그 사람이 자살을 선택하려는 세상은 곤란하다고 멋대로 생각한다. ..체내의 종교가 같은 사람의 죽음은 본인의 죽음으로만 수습되지 않는다. 그 죽음은 같은 종교를 지닌 자를 죽인 것이기도 하다. 뒤집어 생각하면 같은 종교의 사람이 심신 모두 건강하게 살고 있다면 놓아 버리고 싶은 내일을 끌어당기고 싶을 때가 온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세상이라면 자신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믿는 순간이 틀림없이 있다. ..그러므로 자살은 금지. 그 밤에 재회해 둘은 그렇게 약속했다.
277p.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특이한 성적 취향을 들키지 않고 끝났다는 안도감 외에 느낀 감정이 있었다. 이제 서른이 다 된 성인이면서도 이 우주에 혼자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가까운 초조한 감정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부모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해도,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을 인식해 준 유일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이 세상과 자신을 연결해 준 탯줄이 드디어 잘렸다고 해야 할까, 동서남북이나 상하좌우를 알려 주는 좌표 자체가 사라진 듯한 감각이었다....
290p. ...그런 자신조차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한 성적 취향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데 스스로 놀랄 만큼 안심했다. 역겨워 견딜 수 없었던 나라는 존재가 오히려 생리적 혐오감을 느껴 절로 눈을 돌리고 싶어지는 성적 취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깊고 풍부한 호흡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319~320p. ..이 세상에는 틀림없이, 두 가지 진로가 있다. ..하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성적 감정을 최대한 다 발견해 내려는 방향. 규제하는 인간 쪽은 최대한 시야를 넓혀 ‘성적인 것‘에 해당하는 사상을 끝까지 발굴해 하나씩 규제를 걸어 누군가가 나쁜 감정을 느낄 가능성을 최대한 제거하려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 시야가 궁극적으로 매우 좁음을 저마다 인정하고 자신이 상상하지 못하는 것투성이의, 애초부터 아무도 판단할 수 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탐구하는 방향. 언제나 누구든 누군가의 ‘성적인 것‘ 속에서 살아간다는 전제 아래 나아가는 방향.
328p.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욕구는 세상의 긍정을 받는다. 온 세상이 성욕을 품은 대상과의 연애를 장려하고 성욕을 품은 대상과의 결혼, 그리고 생식은 우주의 축복을 받는다. 그런 풍경 속에서 살았다면 나는 어떤 인격으로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344p. ..정말 연대하고 싶은 상대는 저런 장소에서 당당하게 손을 들고 서로 존재를 확인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몰래 만날 수밖에 없는 누군가이다.
365p. ..물 같다. 요시미치는 영향, 조장,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방패로 기능하는 상황을 만날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다. 제대로 된 측의 주민은 물과 비슷하다. 온도도 형상도 죄다 바깥으로부터의 자극에 그대로 따라 반응하는 존재. 그쪽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떤 자극 속에서도 자신을 유지하는 능력을 단련하기보다 제대로 된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줄 요소를 죄다 멀리하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 어엿하다는 정의에는 윤곽조차 없는데.
445p. (해설) ..정욕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그것은 타자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조차 잃고 만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정욕의 문제는 출구가 없다는 점이다. 정욕을 비판하는 것 역시 정욕이듯, 다양성에는 다양성을 부정하는 다양성이 있을 곳이 없다. 관용은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일 수밖에 없다. 저주 같다. 우리는 정욕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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