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많이 할수록 실수도 많아진다. 일을 적게 할수록 실수도 적어지고, 아예 하지 않으면 실수도 없다’라는 말이 시시때때로 뤄 독찰의 귀에 들려왔다. 그가 1985년 경찰에 투신한 것은 경찰이라는 신분을 동경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경찰이란 악한 자들을 없애고 선량한 시민을 지키며 정의를 수호하는 신성한 의무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새로 경찰이 된 후배들 대다수는 경찰을 ‘신분’이 아니라 ‘직업’으로 여겼다.... - P-1

...뤄 독찰은 시간이 부족할 때 사람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쉽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럴 때는 아무리 영리한 범죄자라도 멍청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있었다. - P-1

..하지만 승냥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다. - P-1

..연못 바닥에 더러운 진흙이 잔뜩 쌓여 있더라도 마구 휘젓지 않는다면 연못물은 여전히 맑게 유지된다. 진흙을 퍼내고 싶다면 조심스럽게 조금씩 걷어내야 한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퍼내려 하면 물이 혼탁해지기 쉽다. 연못의 생태계를 자칫 다 망가뜨릴 수도 있다. - P-1

.."샤오밍, 탈옥 역시 살인과 똑같아. 사실은 아주 간단한 거지." 관전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죽이려면 총알 하나만 쏘거나 칼로 가볍게 베기만 해도 돼. 탈옥도 마찬가지지. 인력과 물자가 충분하다면 아무리 삼엄한 감옥이라도 감옥 벽에 구멍을 뚫어서 죄수를 데리고 나갈 수도 있어. 이런 범죄의 어려운 부분은 ‘과정’이 아니라 ‘끝’이지. 사람을 죽인 뒤 어떻게 경찰의 눈을 피할 것인가? 탈옥 후 어떻게 경찰의 추적을 피할 것인가? 이것이 살인과 탈옥이 어려운 원인이야."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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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p.
..언어와 문화는 서로를 파고들며 꼭 붙어 함께 진화한다. 한국어가 말의 가장 작은 단위인 형태소까지 샅샅이 살펴야 상대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고도로 맥락화된 언어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1

33p.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모셔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힘이 센 사람이다. 눈치 사회에서 말을 적게 해도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영화 속 부자나 갱단 두목이 손가락만 까딱해도 주위에서 필요한 것을 척척 대령하는 장면도 같은 이치다. 말을 적게 하는 것이 권력의 상징이 되면, 질문하고 자꾸 말 시키는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 나의 권위를 해치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P-1

50p.
..나는 여기서 간단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가족들이 TV를 보고 있는 거실에 나가 허공을 바라보며 "정이 없네"라는 한마디를 맥락 없이 던져보았다. 가족들은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왜, 뭐 줄까?"라고 묻거나 그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정 없다‘의 실체는 그때 확실해졌다.
..‘정 없다‘는 말은 뭘 달라는 얘기인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은 말을 알아달라는 얘기고, 나조차 모르는 내 신호를 최대한 선의로 해석해달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정이 떨어진다는 말은 선언도 아니고 질문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일종의 위협일 수 있다. ‘나는 지금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정이 떨어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니까 그러지 않도록 조심해‘라는.... - P-1

84~85p.
..누가 개떡같이 뱉어놓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을 필요도 없고 반대로 꼭 찰떡같이 말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한 다음 물어보면 된다. ‘지금 이 발화를 시작하려는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일까?‘라고. - P-1

106p.
..현상에 이름이 붙고 진단이 따르고, 그 언어를 통해 바깥과 연결되는 경험은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을 때, 나조차 나를 돕는 데 관심이 없을 때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하는 일은 아주 작은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외부의 말로 붙은 이름을 배우는 것, 그 이름을 통해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아는 것. - P-1

141p.
..즉, 내가 무언가를 보고 노랗거나 까맣거나 희다고 하지 않고 누리끼리하다거나 거무죽죽하다거나 허여멀겋다고 하면, 그것은 단지 색상을 다르게 지칭한 것이 아니라 평가한 것이 된다. 우리 언어는 색상 이름 안에도 주관적인 판단을 숨겨놓았다. - P-1

151p.
...그는 2017년 TED 강연에서 "두 번째 언어를 갖는 것은 두 번째 영혼을 갖는 일이다"라는 샤를마뉴의 말과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그 향기는 여전히 달콤할 것입니다"라고 한 셰익스피어를 인용한다. 언어가 인식을 결정한다는 입장이 샤를마뉴, 언어는 실물 세계를 바꿀 수 없다는 주장이 셰익스피어로 대표된다 치면 이 두 시각의 대결은 매우 오래된 싸움이라는 것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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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누가 끝이 딱 떨어지는 금액을 빌려달라고 할 때는 주의하는 편이 좋습니다. 숫자가 구체적이지 않다는 것은 빌리는 사람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주먹구구식이라는 게 뻔히 보이죠. - P-1

..마사타카는 제가 소중히 아끼던 감정을 빼앗아 갔지만 그의 존재는 제가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 최고의 소설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변했습니다. 아주 큰 힘을 가진 원동력으로요.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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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126p. «세 번째 남자»
..부모님의 과거를 돌이켜보니 마리코는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수수께끼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지갑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혹은 지갑을 다른 사람이 주웠다면, 부모님은 결혼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에 어머니가 다른 사람과 맺어져 아이를 낳았다면 그건 ‘내‘가 아니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나‘를 낳게 한 우연한 만남은 부모님에게만 찾아오지 않았다. 조부모와 그보다 윗세대에서도 면면히 반복되어 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세상에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 같았다.
..더욱이 그 기적은 ‘나‘에게만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 길에서 스쳐 지나갔던 아이에게도,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내‘가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굉장한 기적이면서도 굉장히 진부한 일이기도 했다. - P-1

204p. «아마기 산장»
..이런 곳에 집이 있다는 것 자체가 별안간에 믿기 어려웠다. 이치에 맞지 않는 장소에 세워진 건물은 비석보다 더 으스스하다는 사실을 하야미는 처음 알았다. 시옷 자를 그리는 지붕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요기가 피어오르는 것도 같았다. - P-1

236p. «아마기 산장»
..하야미는 수긍한 뒤 술잔을 입으로 옮기면서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이매망량을 골똘히 생각했다.
..사람의 모습을 띤 괴물들이 시대와 이름을 바꾸어 언제 다시 이 나라에 발호할지, 그걸 감시하는 것이 펜을 쥔 자의 소임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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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도 여러분, 나의 그 고집스러움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 당신네들이 과연 그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가장 불쾌한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사실은 짓궂은 인간이 못 될뿐더러 세상에 원한을 품을 만한 위인도 아니며, 다만 부질없이 참새 같은 작자들을 혼내주는 것으로 자위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한시도 쉴새없이, 심지어는 무섭게 울화통을 터뜨린 순간에도, 수치감과 함께 자각한다는 바로 그 점이다.
..입에 거품을 물고 으르렁거리다가도, 만약에 누구든 나한테 장난감 인형 같은 것이라도 내밀든가, 차에 설탕이라도 곁들여 갖다주든가 한다면, 나는 금세 얌전해질 수 있는 그런 인간이란 말이다. 아니, 얌전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속에서부터 환희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러한 자기 자신에게 이를 갈듯이 화를 내면서 부끄러움 때문에 몇 달 동안이나 두고두고 불면증에 시달려야 하지만 이게 나의 고질적인 버릇이니 어쩔 수도 없지 않은가. - P-1

..나는 짓궂은 인간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위인이다. 악인도 될 수 없었고 선인도, 비열한도, 정직한 인간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내 방구석에서 최후의 나날을 보내면서 슬기로운 인간은 제정신으론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오직 바보 같은 자들만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뿐이다, 라는 부질없는 자위로 스스로를 우롱하고 있다. 그렇다, 19세기의 인간은 마땅히 정신적인 면에서 무성격적 존재여야 한다. 반면에 성격을 지닌 인간, 즉 실무적인 활동가는 천박한 존재일 수밖엔 없다. 이게 나의 40년에 걸친 지론이다. - P-1

..그건 그렇고, 의젓한 인간이 진심으로 만족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란 도대체 무엇일까?
..답—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그럼 나도 내 이야기를 하기로 하겠다. - P-1

...당신들은 웃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도 유쾌하다. 물론 나의 익살은 야비하고 세련되지 못한 데다가 자신감도 없어 보일 테지만, 그건 내가 나 자신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의식이 발달한 인간이 어찌 자기를 존경할 수가 있겠는가? - P-1

...도대체 문명이 인간 내부의 어떤 성질을 온순하게 만든다는 건가? 문명이란 오직 감각의 다면성을 발달시킬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다면성을 더욱 발달시켜나가면 인간은 아마 유혈 속에서 쾌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았는가. - P-1

..그럼 여기서 당신들에게 묻거니와, 이런 기묘한 성질을 타고난 동물인 인간에게 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한 번 시험 삼아 지상의 온갖 행복을 인간의 머리 위에다가 한꺼번에 퍼부어, 행복 속에 풍덩 가라앉아버리게 하여, 그 행복의 표면에 물거품 같은 것이 꾸럭꾸럭 떠오르도록 해보라. 아니면, 인간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경제적 만족을 주어, 실컷 잠이나 자고 꿀떡이나 먹고 세계사의 영속이나 염려하는 따위 일밖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처지에 놓아보라. 그래도 인간은, 오직 배은망덕의 습성 때문에, 더러운 고집 때문에,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야 말 것이다. 꿀떡이 주는 행복조차도 희생할 각오로 자기를 파멸시키는 비경제적이고 바보스러운 넌센스를 기어이 원할 것이다. 그것도 다만 이 분별에 찬 질서정연한 세계에 파멸과 환상의 분자를 혼합시키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공상과 비천하기 짝이 없는 욕망을 언제까지나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인간이다. 결국 그것은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 피아노의 건반은 아니라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데 지나지 않는다. - P-1

..여러분,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의식적인 타성이 가장 좋겠다! 그러니까 지하생활 만세랄 수밖에! 나는 울화통이 터질 만큼이나 정상적인 인간이 부러워 죽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러나 현재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그들이 있는 한, 그들 축에 끼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다(그래도 역시 부러운 건 사실이지만…… 아니다, 아니야, 뭘로 보나 지하 세계 쪽이 훨씬 낫다!) 거기서는 적어도……. 제기랄, 나는 또 허튼소리를 하고 있구나! 허튼소리고말고! 왜냐하면 지하생활이 가장 좋은 건 절대 아니고, 내가 갈망하는 건 뭔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걸 2×2는 4만큼이나 분명히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알긴 하면서도 좀처럼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하생활 같은 건 귀신에게나 줘버려라! - P-1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곤 했다—남들이 자기를 역겨워하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제외하면 다른 누구의 머리에도 떠오르지 않는 것은 대체 어찌 된 일일까?... - P-1

...그는 나의 일생을 통해 변함없는 유일한 친지인데, 나 자신도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나의 공상이 행복의 절정에 달해서, 당장에 세상 사람들, 아니 온 인류를 포옹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시기가 도래했을 때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 한 사람이라도 실재하는 인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안톤 안토노비치한테 가는 것은 면회일로 되어 있는 화요일에 한한다. 따라서 온 인류를 포옹하려는 내적 욕구를 언제나 화요일에 맞춰야만 했다. - P-1

...나의 거처는 곧 나의 은신처이며 나의 껍질이며 나의 상자여서, 나는 그 속에서 온 인류를 피해 숨어 살고 있었다.... - P-1

..그뿐만 아니라, 나는 구석진 곳에 틀어박혀 돈도 없이 모든 현실과 인연을 끊은 채 지하의 세계에서 증오와 원한을 쌓아올리는 것으로 자기의 생활을 소모했다는 등의 얘기를 길게 늘어놔봐야 하나도 재미가 없을 건 뻔한 일이다. 소설엔 주인공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엔 일부러 계획한 것처럼 주인공다운 것과는 정반대되는 성질만을 하나하나 거둬 모아놓지 않았는가. 그리고 첫째로 이런 일은 독자에게 불쾌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두 실생활에서 동떨어져 있어서 생활이란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들 정신적으로 절름발이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멀리 동떨어져버려서 때로는 ‘산 생활’에 대해 일종의 혐오를 느낄 지경이다. 그 때문에 ‘산 생활’을 상기시키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제 병이 고질화되어, 진짜 ‘산 생활’을 마치 무슨 힘든 노동이나 되는 것처럼 느끼며, 차라리 ‘소설식인’ 생활 쪽이 좋다고 모두들 속으로 생각하게끔 되어버린 것이다. - P-1

...우리는 이를테면 생명 없는 사산아, 그것도 살아 있는 아버지한테서 태어난 것이 아닌, 몇 대에 걸친 사산아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이 점점 우리의 기호에 맞아가는 모양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되도록이면 아버지 아닌 관념에서 인간이 태어나도록 궁리를 하게 될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만두기로 하자—나는 이제 ‘지하의 세계’에서 글을 쓰기가 싫어졌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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