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p.
..너는 말이 별로 없었기에 무언가를 틀린 적도 거의 없다. 너는 밖에 별로 안 나갔기에 말도 적게 했다. 가끔 외출할 때면, 너는 듣거나 바라보는 쪽이었다. 너는 이제 더는 말하지 않기에 계속해서 옳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를 다시 살게 하고 너에게 질문을 던지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너는 여전히 말하고 있다. 우리는 네 대답을 듣고, 너의 현명함에 감탄한다. 그러나 만약 네 말이 사실과 다르다고 드러난다면, 우리는 너를 잘못 이해했다고 자신을 책망한다. 너는 진실이고, 우리는 거짓이다.

16p.
..너의 삶은 하나의 가설이다. 늙어서 죽는 사람들은 과거의 집합체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한 것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너를 생각할 때는, 네가 될 수 있었던 것들이 따라온다. 너는 가능성의 집합체였고 그렇게 남을 것이다.

32p.
..너는 넘치는 것을 거부했다. 너는 조금 했지만 잘했고, 못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너는 현대적인 갈증을 몰랐다. 너는 모든 것을 당장 가지려는 욕구가 없었다. 너는 먹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말하고, 외출하는 것을 자제하기를 좋아했다. 너는 커튼을 친 네 방에서 며칠 동안이나 빛 없이 흡족히 살 수 있었다. 너는 신선한 공기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침묵은 너를 기쁘게했다. 이 메마름은 너의 오래된 의식이었다.

39p.
...만약 네가 네 나라에서 이렇게 행동했다면, 사람들은 너를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미친 사람으로 대했을 터였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외국인의 어처구니없는 행동 방식이 용납된다. 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너는 소외되지 않으면서 미친 사람이 되는, 지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바보가 되는, 죄책감 없이 사기꾼이 되는 기쁨을 맛보고는 했다.
..너에게 외국이란 카페에서 단둘이 만나는 친구처럼 네가 동등하게 대하고 싶은 존재였다. 네가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면, 그 나라는 작아졌다. 네 동반자는 그 나라만큼이나 여행의 주제가 되었다. 단체 여행에서 나라는 지나치게 소심한 손님처럼 존재감이 잊히는 조용한 접대자가 되고 말았고, 중심 주제는 배경 막이 되고 말았다. 웃기고 수다스러운 단체와 함께한 영국 여행의 끝에서 너는 성인을 위한 여름 캠프는 이제 끝이라고 다짐했다....

40~41p.
..너는 다른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것처럼 사전을 읽곤 했다. 너는 각 표제어가 다른 항목에서 다시 나타나는 등장인물이라고 말했다. 복합적인 줄거리는 무작위로 읽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바뀐다. 사전은 소설보다 세상과 닮았는데, 세상은 행위의 일관적인 연속이 아니라 지각된 것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관찰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물들이 서로 모이고, 지리적인 근접성이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사건들이 연속되면 우리는 그것이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전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역 니은 디귿은 니은 디귿 기역보다 더도 덜도 연대적이지 않다. 네 삶을 순서에 맞게 묘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나는 너를 무작위로 기억한다. 주머니에서 구슬을 골라 꺼낼 때처럼, 내 머리는 예측 불가능한 세부 사항을 통해 너를 되살려 낸다.

45p.
..너의 고통은 해가 지면 진정되었다. 행복의 가능성은 겨울에는 다섯 시에, 여름에는 그보다 늦게 시작했다.

71p.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화창한 날씨, 더위와 햇볕은 너에게는 외출하라는 초대, 고독에 대한 방해, 기쁨에 대한 의무와도 같았다. 너는 행복이 날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거부했다. 너는 그 행복의 유일한 책임자이고 싶었다. 누가 좋은 날씨를 이유로 너를 만나자고 청하면 너는 그 초대를 거절했다. 너는 흐린 날씨, 겨울, 비 혹은 추위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때 자연은 너의 기분에 일치되는 것처럼 보였다. 나쁜 날씨는 너에게서 외출하지 않는 죄책감을 덜어줬다. 너는 다른 사람들 눈에 너의 유폐가 이상하게 보일 것을 걱정하지 않고 집에 머물 수 있었다. 아무도 네가 방에 틀어박히기를 좋아한다는 것에 관해 물으러 오지 않았다.

79p.
..각각의 사건들이 시작, 구현 그리고 완성으로 구성된다고 했을 때, 너는 시작 단계에서 욕망이 쾌락보다 강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선호했다. 시작 단계는 사건이 완성 단계에서 잃고 마는 잠재력을 보존하고 있다. 욕망은 성취되지 않는 한 연장된다. 쾌락은 욕망의 죽음을, 곧이어 쾌락 자체의 죽음을 뜻한다. 시작을 좋아하는 네가 자신을 지워 버린 것은 뜻밖의 일이다. 자살은 끝이니까 말이다. 아니면 너는 그것을 시작이라고 판단했을까?

93p.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졌고, 너는 이 사람 저 사람과 함께 대화했다. 오랜 친구와 둘이서 이야기할 때, 너는 네가 맞는 말을 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명에게 얘기할 때면, 그 둘을 동시에 설득할 수 있는 말의 형식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그것을 찾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들의 다른 점을 강조하는 물리적 거리는 각자와 동시에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상기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 네 이야기를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때면, 네 말은 특정한 사람을 향하려고 하지 않았고, 무슨 말이 전달되었는지에 대한 너의 걱정 없이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너는 더는 한 사람을 보지 않았고, 개인들이 녹아든 그룹만을 볼 뿐이었다. 네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말하기 위해서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의 가장 가까이에 있어야 했고, 연설할 때는 그들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 두 사이에서는 너는 오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107p.
..태어나는 것은 나에게 일어난 일이고
..사는 것은 나를 차지하는 일이고
..죽는 것은 나를 끝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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