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조금씩, 특히 마지막 두어 달 동안 로즈는 이전의 모습을 되찾아 갔는데, 예를 들어 음식을 입에 넣으면 맛이 느껴진다는 사실, 도시에 비가 내리면 자신에게만 그 비가 내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 모든 남녀가, 그리고 아이들까지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물웅덩이를 피해 발걸음을 옮긴다는 사실을 다시금 발견해 나갔다....

...그렇게 퍼거슨이 태어났고, 어머니의 몸에서 나온 후 몇 초 동안 그는 지상에서 가장 어린 인간 생명체였다.

...어머니가 그의 어깨를 팔로 감싸 안는 순간 그는 겁에 질렸는데, 단순히 아버지의 상점이 불타 버렸고 이제 가족이 살아갈 돈이 없어서, 그래서 구빈원에 들어가 남은 인생 동안 죽과 말라 빠진 빵만 먹으며 지내야 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도 충분히 나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어머니가 그보다 강하지 않다는 사실, 세상이 때리면 어머니도 그와 마찬가지로 아파한다는 사실, 어머니는 그저 그보다 나이가 많을 뿐, 둘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세상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게 당연히 그랬어야 하는 어떤 모습의 가짜 복사판에 불과했고,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은 벌어지지 말았어야 하는 일들이었다....

...상처받은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 가득한 행동을 통해 사랑을 외치고 있었고, 역시 상처받은 아버지는 아들을 한 대 갈기지 않음으로써, 아들이 자신을 때리게 내버려 둠으로써 사랑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잠잠할 때면, 전투가 잠시 멈추고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배를 탄 듯 함께 유유히 흘러갈 때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는 걸 퍼거슨은 알아차렸다. 돈 이모부는 노아와 이야기할 때 마치 성인을 대하듯 했던 것이다....

...퍼거슨은 점점 더 작아지는 원주민 소녀가 점점 더 작아지는 버터 상자를 들고 있는 그 모습이, 검은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는 퀘이커교도가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작아지는 퀘이커 오츠 상자의 그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한 세계 안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 안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 안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 그런 식으로 세계가 원자만큼 작아진 후에도, 그보다 더 작은 세계가 있을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대단한 비였다. 일단 입구를 벗어나서 밖으로 나오고 보니, 지금까지 그렇게 강한 비는 맞아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빗방울은 그가 맞아 본 어떤 빗방울보다 크고 속도도 빠를 뿐 아니라, 마치 납으로 된 탄환처럼 엄청나게 위력적이어서 몸에 멍이 들고 머리에 구멍이 날 것만 같았다. 장엄한 비였고, 전지전능한 비였다. 그걸 온전히 음미하려면 18미터쯤 앞에 있는 참나무 숲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았다. 나뭇가지와 잎이 떨어지는 총알들로부터 그를 지켜 줄 거라고 기대한 퍼거슨은,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질척거리고 미끄러운 땅을 가로질러 나무들을 향해 질주했다. 머리 위와 주변에서 천둥이 울리고 몇 미터 거리에서 벼락이 내리치는 가운데, 발목까지 잠기는 물웅덩이들을 첨벙거리며 달려 지나갔다. 나무에 도착했을 때는 온몸이 홀딱 젖어 있었지만, 기분 좋은 축축함이었다. 그렇게 몸이 젖는 건 최고의 느낌이었고, 퍼거슨은 행복했다. 그 여름은 물론 그의 인생에 있었던 모든 여름, 혹은 모든 시절 중에 가장 행복했고, 그게 살면서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 같았다.

...그리고 지금, 피할 수 없는 두려운 상황이 닥쳤는데, 어머니가 몸을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살짝 건드리며 고개를 들어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게 한 것이다. 어머니의 손이 자신의 턱에 닿는 순간, 그는 모든 희망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몇 달 만에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아무런 경고 없이 그렇게 다시 수도꼭지가 열려 버리는 상황은 모욕적이었고, 어리석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훌쩍이는 스탠〉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머릿속 배관이 잘못되어 버린 아홉 살짜리 갓난아기. 어머니의 눈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용기를 냈을 때는 양쪽 볼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입이 저절로 움직이며 말들이 튀어나왔다. 힐리어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느님과의 싸움과 성적이 나빴던 이유, 멈춰 버린 머릿속 목소리와 살해된 아버지, 벌을 받기 위해 규칙을 어기고, 그다음엔 벌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느님을 미워했던 일까지, 퍼거슨은 어머니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눈은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워 보였고, 거의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2분, 3분, 4분 정도 이야기를 했을 때 어머니가 몸을 숙이고 그를 껴안으며, 그만해도 된다고 했다. 됐어, 아치. 그만해도 돼. 어머니가 말했다. 그런 다음 둘은 함께 울음을 터뜨렸고, 그 눈물의 향연은 거의 10분 가까이 이어졌는데, 두 사람이 서로의 앞에서 감정이 무너져 버린 마지막 순간이었고, 스탠리 퍼거슨의 시신을 땅에 묻었던 날 이후로 거의 2년 만이었다. 울음이 천천히 멈춘 후에는 세수를 하고, 외투를 꺼내 입고 영화관으로 갔다. 저녁을 먹는 대신 발코니석에서 핫도그를 잔뜩 사 먹었고, 김빠진 콜라와 함께 커다란 박스에 든 팝콘도 나눠 먹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이 본 영화는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였다.

...그녀의 웃음은 아이들이 참지 못하고 꽥꽥 내지르는 소리가 아니라 배 속 깊은 곳에서 연달아 나오는, 울림 있는 큰 웃음이었는데, 활기차고 요란한 웃음이면서 동시에 생각이 있는, 자신이 웃는 이유를 아는 웃음이었다. 덕분에 그 웃음은 지적인 웃음, 웃게 한 대상뿐 아니라 스스로도 의식하면서 웃는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지 아닌지는 절대 알 수가 없다는 거야. 그 모든 사실을 알았어야 하는데, 그 모든 사실을 알 방법은 두 곳에 동시에 있는 것밖에 없고 ─ 그건 불가능하잖아.
..그래서?
..그래서 사람들이 신을 믿는 거 같아.

..앤디의 아버지도 죽었다는 게 도움이 된다고, 퍼거슨은 생각했다. 둘 다 세상에 없는 남자의 아들이고, 적어도 나쁜 날들, 최악의 날들은 그 유령과 함께 보내기도 한다는 게 도움이 되었고, 최악의 날들에는 언제나 세상의 빛이 가장 환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게 그들이 영화관의 어둠을 찾는 이유, 어둠 속에 앉아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이유인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폭도로 변해 버리는 모습을 퍼거슨이 목격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그날 아침 그가 알게 된 거부할 수 없는 교훈은, 군중은 때로 그 군중에 속한 개인 한 명 한 명은 감히 드러낼 수 없는 숨은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시간은 양방향으로 움직였는데, 미래로 내딛는 걸음마다 과거의 기억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퍼거슨은 아직 열다섯 살도 되지 않았지만, 주변 세상이 자기 안의 세상에 따라 계속 모양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충분히 기억을 쌓아 왔다. 다른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경험하는 세상의 모양 역시 그들 각자의 기억에 따라 결정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공간에 함께 있었지만 시간을 가로지르는 각자의 여정은 모두 달랐고, 그 말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씩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당시 퍼거슨은 어떤 세상에 살고 있었고, 그에게 그 세상은 얼마나 달라져 있었는가?

..린다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퍼거슨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녀는 기개보다는 실리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는데, 그는 그런 식의 논쟁을 싫어했다. 삶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법, 체계를 활용해 그 체계에 타격을 주는 것, 다른 규칙이 없기 때문에 망가진 규칙을 따르고, 폐기하고 새 규칙을 만들어야 함에도 여전히 기존의 규칙을 활용하는 것. 또한 린다는 자신들의 세계에 적용되는 규칙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앞서 나가고, 신분을 높이고, 좋은 직장에 자리 잡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지녔으며 마당의 잔디를 깎고, 새 차를 몰고, 세금을 내고, 2.4명의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는 교외 지역의 규칙을 믿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오직 돈의 힘만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퍼거슨은 그 논의를 이어 가는 게 아무 의미가 없음을 이해했다. 당연히 그녀의 말이 옳았다. 하지만 그의 말도 옳았고, 갑자기 그는 그녀를 더 이상 원하지 않게 되었다.

..길이 그 일에 대해 농담할 수 있었던 건, 그 밖에 가능한 다른 반응은 화를 내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몸 안에 화를 담은 채 돌아다니는 건 좋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고, 길은 퍼거슨에게 말했다. 그건 의미 없고 자기 파괴적이며, 자신이 화내지 않을 거라고 믿는 상대방에게는 잔인한 일일 뿐인데, 화의 원인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인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하는 동안 그가 원했던 키스는 절대 받지 못할 거라는 고통이 줄곧 따라다녔다. 짐을 소유한다는 건 짐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고, 소유하면서 소유하지 못한 상태란, 진짜 감정을 드러내려면 영원한 모욕감이라는 불길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갈 걸 각오해야 하는 상태라는 뜻이었다....

...처음으로 퍼거슨은 자신이 너무나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에게는 아주 작은 갈등 상황을 헤쳐 나가는 일도 너무 힘들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갈등이 자기 결점이나 어리석음 때문에 발생했을 때는 특히 더 그랬는데, 요점은 그는 사랑받을 필요가 있었다는 점, 대부분의 사람보다 더 사랑받아야 했고, 깨어 있는 시간에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사랑받아야 했고, 사랑스럽지 않은 짓을 했을 때도, 특히 이성적으로 생각해서는 사랑받을 수 없을 때도 사랑받을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그날부터 자신이 본 모든 영화에 관해 1페이지짜리 기록을 남기고, 그것들을 책상에 있는 3공 특별 서류철에 보관하기로 했다. 그게 삶을 놓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었다. 어둠 속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그랬다, 하지만 늘 손에 초 하나를 들고 주머니에는 성냥 한 갑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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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p.
..두 사람의 이런 생활을 보고 시어머니는 ‘소꿉장난 같다‘고 한다. "그거 좋구나, 소꿉장난 같아서 재미있겠네." 시어머니가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때, 부러 꾸며낸 듯 반짝거리는 시어머니의 눈빛은 제 아들이 아니라 이쓰미를 향한다.

36p.
.."좀 개운해졌어?"
..이쓰미가 묻자 남편은 이쓰미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금세 시선을 노트북 화면으로 돌리며 "그렇지도 않아"라고 대답했다. 막차 시간까지 야근하고 온 듯한 목소리였다.
.."개운한 느낌보다 훼손됐다는 느낌이 더 커."

53p.
...양팔을 벌리니까 많은 비가 동시에 여기저기에 부딪혀서 튕겨나가는 게 잘 느껴지더라. 소리가 엄청나게 컸어. 우산을 쓰면 안 들리는 소리겠지 싶었어.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니까 비가 큰 소리를 내면서 하늘에서 떨어지더라....

107~108p.
..대체 뭘까. 잘은 모르겠지만 목욕을 안 하게 되었을 때부터 남편이 저 너머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손을 뻗으면 이쓰미도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발밑을 보면 희미한 선이 그어져 있다. 자세히 보면 그 선은 페인트로 그린 것이 아니라 땅속 깊은 곳까지 팬 균열이다. 너무 깊은 탓에 빛을 흡수해서 검은 선으로 보이는 것이다. 좁은 균열이라 거기 빠질 일은 없다. 다만 남편이 서 있는 땅과 이쓰미가 서 있는 땅을 분명하게 나누고 있다. 이쓰미도 언제든지 그 선을 넘을 수 있다. 평범한 한 걸음보다 작은 보폭으로도 넘을 수 있을 만큼 좁은 틈이다. 그러니까 딱히 언제든 상관없다고, 남편 곁으로 가고 싶어졌을 때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137p.
..자신의 결심이나 생각을 뒤늦게 깨달을 때가 있다. 어떤 순간에 결심했다기보다, 어느 사이엔가 결정했던 일을 시간이 꽤 흐른 뒤에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이게 최종 결정이겠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의 순간은, 누군가와 대화할 때 자신이 쓰는 미묘한 표현에, 선풍기 날개가 부러졌는데도 곧장 새 선풍기를 사지 않는 행동에, 매일 열심히 확인했던 뉴스 사이트를 사흘이나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했을 때 찾아오곤 했다.

166p.
..두 번 다시 다이후짱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이쓰미는 갑자기 다이후짱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무심코 한 손으로 뺨을 쓰다듬는다. 그 손끝에 물방울이 묻어 있었던 모양인지 뺨이 축축한 느낌이다. 그릇은 바싹 말라 있는데도. 이쓰미는 기분이 나빠져서 어깨에 얼굴을 비벼 닦는다. 그렇게 고개를 움직이는 동안 다이후짱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형태는 물론이고 색, 크기, 분명 수없이 보았던 눈까지 대체 어떤 눈동자였는지, 어류의 무심해 보이는 눈이었는지, 우파루파의 눈처럼 새까만 구멍 같았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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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플리카가 생겨나고 유행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디자이너나 경영인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던 패션 산업의 일부분이 생산자와 공장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옷을 직접 만드는 사람들은 지금껏 디자이너나 경영인의 뒤에 머물렀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을 거치며 확장된 생산자 제조 중심의 패션 트렌드는 이들 생산 주체를 패션 산업의 전면으로 내세웠다.

..테네시에 있는 포인터 브랜드의 공장들은 여전히 구식으로 돌아가며 아직 현대화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이러한 공장이 미국 전역에 수없이 많았지만, 지금은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해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포인터 브랜드의 경우처럼 몇몇 남은 공장들은 아메리칸 메이드 트렌드와 구식 공장 제품이 지닌 독특한 외향과 촉감이 다시 인기를 얻으면서 각광받고 있다. 일본의 데님 마니아들과 서구의 워크 웨어 팬들이 이들 공장 문을 계속 두드리고 있으며 수많은 업체에서 올드 아메리칸 제품 생산을 의뢰하고 있다. 한마디로 포인터 브랜드는 현재 진행 중인 아메리칸 트래디셔널 트렌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빈티지 청바지를 만들 때 보통 십여 종류의 재봉틀을 사용하는데, 지금도 오슬로우의 작업 스튜디오에는 구형 유니언 스페셜부터 컴퓨터가 제어하는 최신 기종까지 삼십여 대의 공업용 재봉틀이 놓여 있다. 이것들은 그저 장식용이 아니라 실제로 샘플을 만들어서 제조 공장과 좀더 원활히 소통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한다. 오슬로우의 몇몇 제품은 공장을 통하지 않고도 스튜디오에서 직접 완제품을 만들 수 있을 정도다.

..미국이나 유럽의 헤리티지 청바지, 데님 웨어, 워크 웨어, 밀리터리 유니폼 등 레플리카 브랜드가 주로 다루는 옷들은 20세기 초중반에 발전했다. 그 시대에 전쟁에 동원되고, 공장에서 일하고, 철로를 놓고, 석탄을 캐고, 소를 몰아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던 사람들이 입던 옷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남녀의 역할 분담 구조가 지금보다 확고했기 때문에 워크 웨어 계열에도 여성 전용 의류는 그렇게 많이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오늘날에는 고단한 육체노동이나 극한의 날씨, 위험한 작업 환경에 따른 위협을 예전의 워크 웨어가 해결하고 있지 않다. 이미 훨씬 더 훌륭하고 기능에 충실한, 가볍고 저렴한 소재들이 많이 나와 있다. 광산에서 일하려고 청바지를 입는 경우는 없다. 만약 현대의 봉제 기술이 부실해서리벳이 필요한 것이라면 치노 팬츠와 슬랙스 등에도 리벳이 붙어 있어야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셀비지의 빨간 줄, 신치 백, 멜빵 고리, 덧댄 캔버스 천 등은 이제 일종의 표식이자 장식으로 존재하며, 레플리카 제품의 배경이 되어 스토리를 탄탄하게 만드는 서사로 기능한다.

..미스터 프리덤의 크리스토프 르아론은 "현대의 자유는 자기만의 감옥을 만드는 데 있다. 감옥의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만 잊지 않으면 된다"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용감하게 감옥 안으로 돌진하든 감옥을 피해 돌아가든 결국 선택은 소비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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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p.
..새로운 방에 ‘정말 좋아하는 물건‘만 채우면서 나는 비로소 내 집에 대해 ‘여기가 바로 내가 살 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43~44p.
..이런 상자나 캔처럼 자질구레한 물건을 보고 있으면, 제일 마지막에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은 세계적으로 가치 있는 물건이나 비싼 물건이 아니라 어쩌면 잡동사니에 가까운 것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54p.
..그때까지 ‘나는 접점이 없는 세계‘인 줄 알았던 세계가 알고 보니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이런 순간이 가장 설렌다.

117p.
..오감을 충족시키는 것은 어떨까.
..좋은 향이나, 좋은 감촉이나, 좋은 음악. 그런 것과 접촉하면 행복하다고 느낀다. 창문을 열면 그 계절의 바람이 불고 커튼을 젖히면 햇볕이 따듯하다. 깜박하고 안 뿌리지만 좋아하는 향수도 있고, 향이 마음에 드는 화장품도 갖고 있다.
..느끼고자 하면 행복이 손에 닿는 곳에 있는데 그걸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나를 실망하게 하는 ‘성실하지 못해 빈곤한 생활‘의 본질인 것 같다.

130p.
..무언가를 할 때, 우리는 죽음에 끌려가지 않고 버틸 수 있다.

167p.
..활기가 샘솟을 때는 그냥 쉬었을 때가 아니라 즐거운 일을 했을 때다. ‘즐거움‘이라는 말을 들으면 환한 미소가 떠오르는데, 내게 ‘즐거움‘은 꼭 웃음의 이미지만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울거나, 친구와 평소에 하지 못했던 깊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공연에 몰입해서 몇 시간 동안 현실을 떠나 새로운 세계에 푹 잠기는 일이다.
..사람에 따라 ‘즐거움‘의 종류는 다양하겠지만, 무언가에 열중하거나 감동하면 내일부터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이 아니라 앞으로 오래 이어질지 모르는 인생을 열심히 살겠다는 의욕이 생긴다. 그런 날이 최고의 휴일이다.

183p.
..할머니의 쇼핑 방식은 나와 비슷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것은 밑져야 본전의 마음으로 열심히 사 모은다. 통일성은 없다. 동경하는 상징물을 사면서 자신 안에 이런 것을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고 인식하는 작업에 가깝다.
..물건을 손에 넣으면 비로소 그게 어떤 욕망이었는지 형태가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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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A란 Unidentified Mysterious Animal의 약어로, 쉽게 말해서 미확인 생물이란 뜻이다. 이름대로 실제로 존재하는지 증명되지 않은 생물을 가리키는 총칭이다.
..영어로 쓰여 있어 외국에서 유래된 명칭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명칭은 일본식 영어다. 모두 다 아는 UFO가 Unidentified Flying Object(미확인 비행 물체)의 약칭이라는 점에서 힌트를 얻어 1976년 일본의 모 유명 SF 전문지가 명명한 것이 시초다. 덧붙여 영어로는 크립티드(Cryptid)라고 부른다.

..공포의 대상은 전국 공통이지만, 동시에 시대를 초월하여 이름을 바꾸어가며 전승되기도 해요.
..메리는 집 전화가 없어진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고, 때로는 문자 메시지로 연락하지. 이젠 뭐, 메리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괴담 자체가 없어졌는지도 모르지만,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시대를 뛰어넘어 계속 남을 거야.

...신이란 존재는 잊히면 나쁜 짓을 한다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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