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p. ..두 사람의 이런 생활을 보고 시어머니는 ‘소꿉장난 같다‘고 한다. "그거 좋구나, 소꿉장난 같아서 재미있겠네." 시어머니가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할 때, 부러 꾸며낸 듯 반짝거리는 시어머니의 눈빛은 제 아들이 아니라 이쓰미를 향한다.
36p. .."좀 개운해졌어?" ..이쓰미가 묻자 남편은 이쓰미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금세 시선을 노트북 화면으로 돌리며 "그렇지도 않아"라고 대답했다. 막차 시간까지 야근하고 온 듯한 목소리였다. .."개운한 느낌보다 훼손됐다는 느낌이 더 커."
53p. ...양팔을 벌리니까 많은 비가 동시에 여기저기에 부딪혀서 튕겨나가는 게 잘 느껴지더라. 소리가 엄청나게 컸어. 우산을 쓰면 안 들리는 소리겠지 싶었어.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니까 비가 큰 소리를 내면서 하늘에서 떨어지더라....
107~108p. ..대체 뭘까. 잘은 모르겠지만 목욕을 안 하게 되었을 때부터 남편이 저 너머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손을 뻗으면 이쓰미도 닿을 수 있는 곳이지만, 발밑을 보면 희미한 선이 그어져 있다. 자세히 보면 그 선은 페인트로 그린 것이 아니라 땅속 깊은 곳까지 팬 균열이다. 너무 깊은 탓에 빛을 흡수해서 검은 선으로 보이는 것이다. 좁은 균열이라 거기 빠질 일은 없다. 다만 남편이 서 있는 땅과 이쓰미가 서 있는 땅을 분명하게 나누고 있다. 이쓰미도 언제든지 그 선을 넘을 수 있다. 평범한 한 걸음보다 작은 보폭으로도 넘을 수 있을 만큼 좁은 틈이다. 그러니까 딱히 언제든 상관없다고, 남편 곁으로 가고 싶어졌을 때 넘어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137p. ..자신의 결심이나 생각을 뒤늦게 깨달을 때가 있다. 어떤 순간에 결심했다기보다, 어느 사이엔가 결정했던 일을 시간이 꽤 흐른 뒤에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이게 최종 결정이겠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의 순간은, 누군가와 대화할 때 자신이 쓰는 미묘한 표현에, 선풍기 날개가 부러졌는데도 곧장 새 선풍기를 사지 않는 행동에, 매일 열심히 확인했던 뉴스 사이트를 사흘이나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했을 때 찾아오곤 했다.
166p. ..두 번 다시 다이후짱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이쓰미는 갑자기 다이후짱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무심코 한 손으로 뺨을 쓰다듬는다. 그 손끝에 물방울이 묻어 있었던 모양인지 뺨이 축축한 느낌이다. 그릇은 바싹 말라 있는데도. 이쓰미는 기분이 나빠져서 어깨에 얼굴을 비벼 닦는다. 그렇게 고개를 움직이는 동안 다이후짱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형태는 물론이고 색, 크기, 분명 수없이 보았던 눈까지 대체 어떤 눈동자였는지, 어류의 무심해 보이는 눈이었는지, 우파루파의 눈처럼 새까만 구멍 같았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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